초록주의(녹색주의)

보편복지와 선별복지

 

 

 

사회복지는 크게 보편복지와 선별복지의 두 가지 대비되는 방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선별복지

 

복지를 국가의 배려 또는 자본주의의 단점을 보완하는 도구로 보는 입장으로 필요한 사람들에게만 선택적으로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재정이 빈약한 후진국에서 많이 나타나고 효율성을 강조한다.

저소득층, 빈민 등 복지 서비스가 필요한 사람에게 집중 제공하기 때문에 보편복지에 비해 효율성이 높고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으며, 대상의 변동에 따라 유연하게 서비스 변화를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서비스 대상자가 한정적이고 형평성이 낮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 혜택을 받는다는 낙인이 있을 수 있으며, 혜택의 기준에 따라 복지의 사각지대가 발생할 수 있다.

선별복지의 예로는 기초생활보상제도, 기초노령연금제도, 아동양육수당 등이 있다.


 

2.보편복지

 

복지를 국가의 의무와 시민의 권리로 보고, 누구나 복지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주장으로 소득 수준 등의 조건이나 자격에 상관없이 모든 국민에게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북유럽을 중심으로 한 선진국형 복지 모델로 평등성을 강조한다.

중산층과 빈민층의 마찰에 대한 완충작용을 해 사회적 안정성을 가져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한다. 또한 삶의 질을 향상시켜 사회를 안정시키고 이를 통해 수요와 일자리를 창출하는 경제 선순환 구조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한다. 선별복지보다 비용이 많이 들고 효율성도 낮지만 형평성이 높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후에 복지 서비스를 받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 예방의 차원으로도 볼 수 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 혜택을 받는다는 낙인이 없다는 장점도 있으나 정부의 재정 지출 확대를 위해 세금 부담을 증가시키는 단점이 있다.

보편복지의 예로는 부모 소득과는 별개로 모든 학생들에게 제공되는 무상급식, 3~5세 모든 계층의 유아에게 유아학비와 보육료를 지원하는 3-5세 누리과정, 반값등록금 등이 있다.


 

3. 우리나라 복지제도

 

사회보장

1차적 사회안전망으로 5대 보험(국민연금, 건강보험, 산재보험, 고용보험, 노인장기요양보험)을 말한다. 전 세계에서 5대 보험을 갖추고 있는 나라는 한국, 일본, 독일뿐으로 보험료를 납부하는 거의 모든 국민이 대상이다.

공공부조

2차적 사회안전망으로 사회보장으로 구제되지 않는 빈곤층을 위한 제도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대표적이다.

사회복지서비스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계층을 위한 서비스로 아동복지, 노인복지, 장애인복지 서비스를 말한다.

 

 

4. 토론할 내용

 

복지는 분배의 문제인가, 권리의 문제인가?

정부의 역할-세금을 걷는 목적과 국민과 국가의 관계는? 복지 확대는 세금을 걷기 위한 정부의 개입이 확대되야 하는데 이는 시장경제에 변수를 가져올 수 있다. 세수원을 마련할 수 없다면 복지도 어려운 것인가?

세금의 형평성-왜 많이 벌면 훨씬 더 많이 내야 하는가? 공유재산을 많이 사용하는 만큼, 일하는 만큼 번 것에 누진적이 아니라 비례적으로 내야 하는 것 아닌가?

무상급식 논란

재벌 총수 같은 사람은 급식비 낼 충분한 여력이 있기 때문에 무상급식 혜택 받을 필요 없는가? 자신의 소득만큼 세금을 냈기 때문에 무상급식 혜택 받을 권리가 있는가?

보편복지와 선별복지 어디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이재명 성남시장의 저소득층 자녀 생리대 지원과 무상급식-무상급식은 원래 저소득층 가정 학생들에게 지원되던 것이었다. 선별적 지원을 하려면 저소득층 학생의 가정환경을 조사하고 지원 대상 명단을 만들어야 해서 저소득층 학생의 집안 사정이 노출된다. 그래서 저소득층 학생들이 수치심을 느끼기 때문에 보편적 복지를 해야 한다는 것이 무상급식의 논리이다. 선별복지는 노출이 안 되도록 관리하면 된다는 것이었는데 좌파는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이라면서 생리대는 왜 선별복지를 하는가?

재분배의 역설은 저개발국가에서도 유효한가

재분배의 역설은 저소득층에 복지 비용을 집중하는 나라일수록 저소득층에게 적은 금액이 재분배(내려간다)된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몰아줄수록 가난한 사람에게 불리하고, 부자에게도 줄 때 부자에게 불리하다는 것이다.

복지 규모가 일정하다면 저소득층 집중지수가 클수록 저소득층에게 더 많이 재분배된다. 그러나 저소득층에게 집중하면 중산층이 복지 규모를 키우는 것에 반대해 복지 규모가 작아져서 저소득층에게 재분배되는 금액이 줄어들게 된다. 반대로 보편적으로 나누어주면 중산층이 복지 규모 확대에 찬성해서 규모가 커진다. 그러면 저소득층에게 재분배되는 금액이 커진다.

 

 

수원시평생학습관 인문사회공유카페(http://cafe.naver.com/suwonlearn)

우리나라는 현재 사형을 구형하고도 1997년 12월 이후 집행하지 않아 실질적 사형 폐지국입니다.

우리나라 형사소송법에는 판결이 확정된 후 6월 이내에 집행하도록 되어 있는 대도 말입니다.

사형제도를 없애는 나라가 늘어나면서 사형의 야만성을 거론하며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는 반면 연쇄살인 등 흉악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범죄예방과 응보를 위해 사형을 존치해야 한다는 여론도 높아지는 등 사형제 존폐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1996년에 이어 2010년에도 사형제도에 대해 '필요악'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형이 비례의 원칙에 따라서 다른 생명 또는 그에 못지아니한 공익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성이 충족되는 예외적인 경우에만 적용되는 한 위헌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현재 형법에는 살인, 강간 살인, 강도살인, 방화치사 등 인명을 빼앗는 범죄와 내란, 내란목적 살인, 간첩죄, 반란, 이적죄 등 국가의 존립과 관련된 범죄에 사형이 있습니다. 특별법인 국가보안법, 폭력행위 등 처벌법, 특정범죄 가중처벌법 등에도 사형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유럽은 대부분 사형제도를 폐지하고 있고, 미국은 주마다 다릅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 가요?

오늘 10시부터 뜨거운 토론이 예상됩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노르웨이는 범죄자를 거의 별장 수준에서 구금하고 있습니다. 면회도 자유롭고요. 최근 형벌에 대한 세계적인 추세는 형벌을 가하는 것보다는 교화에 우선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무소에서 교도소로 이름을 바꾼 것이죠.

이런 추세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등 토론할 쟁점들을 뽑아본다면


1. 형벌을 가하는 이유

범죄예방의 실효성과 응보의 정당성


2. 형벌의 종류와 타당성

우리 형법은 정식형벌로서 사형, 징역, 금고, 자격상실, 자격정지, 벌금, 구류, 과료, 몰수의 9가지를 규정하고 있다(제41조). 그리고 형법은 -형법각칙상 법정형으로 규정된 정식형벌은 아니지만- 형유예재판시에 법관이 선고할 수 있는 보호관찰, 사회봉사명령, 수강명령이라는 제재를 규정하고 있다(제59조의2, 제62조의2). 이론적으로 형벌은 생명형, 신체형, 자유형, 재산형, 명예형의 5가지로 구분된다. 다만, 우리나라 형법상으로는 신체형은 규정되어 있지 않다.


3. 사형제도의 폐해

오판과 정치적 악용


4. 범죄의 책임성

개인적인 것이 큰가, 사회적인 것이 큰가?

 

 

수원시평생학습관 인문사회공유카페(http://cafe.naver.com/suwonlearn)

마을공동체 활동가 간담회가 있어서 서울 올라가려 수원역에서 1호선 상행 지하철을 타러 계단을 올라가려는데(12시 35분 쯤)

약간의 연기 속에서 젊은 학생과 몇몇 사람들이 다급히 뛰어내려 오고 있어 왜 그러지 생각하는 순간

지하철 보안요원들로 보이는 사람 둘이 불이야 뛰어다니면서 불이야 소리치며 사람들에게 역에서 빠져나가라고 시켰습니다.

연기가 심하지 않아 사람들은 융성거리며 천천히 빠져나가고 다행히 저는 연기를 조금만 마셨네요. 

조금인데도 매케한 게 꽤 독합니다.

연기가 심했더라면 아마 아수라장이 되었겠죠.

저는 잠시 간담회에 늦을까 봐 지하로 내려가 분당선을 탈까 생각했었는데 상황에 따라 아주 위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연기가 적다고 좀 여유를 부리는 사람들, 그래서 아수라장까지 되지 않았지만 출구 쪽이나 지하 분당선에서 나오는 중간 통로에서 발생한 경우라면 심각할 수 있었습니다.

화재 발생시 시민들의 행동과 이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지하철역 근무자들의 대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나저나 아무도 피해를 입지 않았어야 하는데...

 

 


무엇을 위한 개발이어야 할까

 

초록주의

 

수원에 오래 산 사람이라면 칠보하면 이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지금은 호매실 지구가 서수원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고 칠보하면 공동 육아 공동체를 시작으로 한 수원 마을공동체의 메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말이다. 고등학교 때 칠보에 사는 친구가 있었는데 스스로도 촌에 산다고 말했을 정도로 칠보는 수원 사람들한테나 지역 원주민들한테나 시골이었다. 나는 칠보가 대략 어디 있는지만 알았지 성인이 되어서도 한 번 가 본 적이 없다가 몇 년 전에야 모임 때문에 겨우 가보기 시작했다.

칠보 지역이 수원에서 그 동안 저평가된 곳이라 개발의 여지가 많은 새로운 투자처라고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개발이 안 되어 자연이 파괴되지 않고 지역 공동체가 살아 있기를 바랄 뿐이다. 개발로 원래 자연 생태계가 그나마 보존되어 있던 곳이 파괴되고, 그러지 않아도 대형마트를 앞세운 신상권과 구상권으로 나누어졌는데 대단위 개발로 인해 새로 외지에서 들어오는 주민들과 원주민들 간에 혹시나 용인처럼 차별이 존재하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용인의 경우 수지에 사는 주민들이 용인 원주민들을 은근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같은 용인이라도 서울에서 살던 도시인과 촌에 살던 촌놈으로 구별을 넘어 차별을 한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원주민들 중에는 농사를 짓던 분들이 많아 땅값 상승으로 땅 부자가 된 분들도 있겠지만 땅을 많이 갖고 있지 않아 사실상 쫓겨나는 분들이 있지 않나 하는 점이다. 개발이나 재개발 되는 지역의 원주민들 중에는 새로 아파트가 지어지면 입주비를 감당하지 못해 쫓겨나가는 경우가 많다. 마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서양인들의 이익을 위해 죽임을 당하고 내쫓기는 것처럼 자신의 삶의 터전을 개발과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빼앗기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사회의 건전성은 그 사회의 약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으며 어떻게 살아가느냐로 평가된다고 흔히 말한다. 옛날부터 칠보에 살았던 원주민이든 사실상 사회적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식물이나 동물 같은 생명들이 자신의 삶터를 잃고 쫓겨나가지 않았으면 한다. 칠보산은 질퍽산(물산)이라 부를 정도로 주변에 자연습지가 많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개발이 안 된 곳이 없어서 자연습지는 보기 어렵다고 한다. 특히 이곳 습지에 자생했던 해오라기난초는 무차별한 남획으로 멸종되었다고 한다. 칠보산에서 처음 발견된 처녀치마는 지금은 칠보산에서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또한 개발로 새로 이사 오는 주민들이 구도심지인과 원주민들을 차별하지 않고 또 새로 입주한 주민들 중에서도 사회적 약자들이 차별받지 않았으면 한다. 그들 역시 서울에서 집을 구입할 돈이 없어 칠보까지 밀려온 분들이 다수일 테니까.

칠보산은 원래 조선시대에는 치악산이나 진악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칠보라 부른 것은 1910년 이후로 칠보는 돌옷, 더덕, 산삼, 황기, 멧돼지, 구리, 철 등 영덕 칠보산의 일곱 가지 보물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칠보산은 원래 여덟 가지의 보물이 있다고 해서 팔보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여덟 가지의 보물이란 산삼, 맷돌, 잣나무, 황금수탉, 호랑이, , 장사, 금이었는데 어떤 장사꾼이 황금수탉을 가져가 버리는 바람에 칠보산이라고 고쳐 불렀다고 한다.

칠보의 일곱 개 마을은 마을 공동체가 살아있어서 경조사가 있을 때 일곱 개 마을이 서로 챙겼다고 한다. 나는 칠보산이 다시 팔보산이 되기를 바란다. 장사꾼이 가져간 황금수탉을 다시 찾아서가 아니라, 개발로 땅값이 올라가 돈이 되는 팔보산이 아니라, 약자를 보살피고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 개발로 새로 이주해 오는 주민들과 원주민들이 공동체라는 보물을 가진 팔보산이 되기를.

1℃

초록 사회 l 2014. 12. 17. 17:06

 

사진의 1℃는 오늘 아침 내 방의 온도다. ^^;

요즘 내 방의 온도는 2~6℃ 사이를 오르락내리락 했다. 어제 오늘 춥다는 뉴스를 들었지만 아침에 일어날 때는 별로 춥다는 느낌이 없어서 날씨가 풀린 줄 알았다. 내 방은 북서쪽 모퉁이에 자리잡아 하루종일 해가 들어오지 않는다. 또 보일러 온수도 잘 들어오지 않아 우리 집에서 제일 춥지만 난방은 전기장판에 의존한다. 그것도 트윈 전기장판의 한쪽만 켜 놓고 잔다. 작년 겨울에는 방 북서쪽 천장 모서리 쪽에 서리가 앉았었다. 내 방 추위는 일이년 그런게 아니라 나한테는 그래도 충분히 견딜만하다. ^^

사실 나는 한겨울에도 찬물로 샤워하는 습관을 이십 년 넘게 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나와 지구의 건강을 위하여 몸을 단련시키고 또 에너지 낭비를 막기 위해서라지만 한겨울 방 안의 온도 1℃는 보통 사람들이 느끼기에는 좀 너무 한 감이 있기는 하다. ^^; 하지만 1℃의 차이는 어떨까? 대부분의 사람은 1℃의 차이를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러면 지구는?

지구의 기온이 1℃가 오르면 미국 서부에 가뭄이 닥치고 기름진 농토 밑의 잠자던 모래층이 드러난다고 한다. 30만 명 이상이 말라리아, 영양 부족, 설사 등으로 죽게 되고  5천만 명 이상이 마실 물 부족으로 죽게 된다고 한다.

새 연구 결과에 의하면 향후 수천 년 동안 지구의 기온이 1℃ 상승함에 따라 전 세계의 해수면이 2.3m 이상 상승할 것이라고 한다. 이 중 1.6m는 남극 얼음이 녹으면서, 40cm는 해수 온도 상승에 따른 팽창으로 올라갈 수위다. 산악 빙하는 20cm, 그린란드 빙하는 10cm만큼 수위 상승을 가져올 것이라고 한다.

Clark은 물리적인 모델을 통해 수행한 향후 시나리오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과거의 해수면 상승 경향과 꽤 일치함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예를 들어 약 12만 년 전에는 현재보다 지구의 기온이 1~2℃ 높았으며 해수면이 5~9m 정도 높았다고 한다. 이것은 모델을 통해 앞으로의 경향을 예측한 것과 일치한다.

해양생태계는 해수온 변화에 매우 민감한 영향을 받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수온 1℃ 이상의 변화는 육상생태계에서 5~10℃ 이상 변한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

한겨울 방 안의 온도가 1℃인데도 따로 난방을 하지 않으며 지내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 ^^; 물론 나는 주로 잘 때만 방에 들어가지만 사람들한테 이렇게 살라고 절대 권하지 않는다. 하지만 방 안의 온도를 체감으로 잘 느끼지 못하는 1℃ 낮추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방 안 온도를 줄이기에 무리가 있다면 내복을 입는 것은 어떨까. 내복을 입으면 체감온도를 평균 3~5℃ 높일 수 있다고 하니 방 안의 온도를 3℃ 정도 내릴 수 있다. 내복이 불편하다면 적정기술을 이용한 난방을 한다면 내복이 없이도 20℃가 넘는 실내 온도를 유지할 수 있다. 지금 지구온난화의 피해가 지구 곳곳에서뿐만 아니라 나한테도 직접적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지구의 온도를 1℃ 낮추지는 못할 망정 1℃ 올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실천이 아닐까 한다.

 

<참고>

① 지난 100년 동안 지구의 평균 온도는 약 0.74℃가 상승했다. 과거 1만 년 동안 약 1℃가 상승한 것과 비교할 때에 매우 높은 증가 추세이고 특히 최근 50년 간의 평균기온은 10년마다 0.13℃씩 상승했다. 이는 지난 100년 동안의 상승폭(0.07℃/10년)보다 2배 정도 높은 수치이다. 최근(2007년 기준)의 10년은 기상 관측 이래로 가장 더운 10년이었으며, 1998년은 지구 평균기온 최고값을 기록했다. 또한 2003년과 2005년은 지구 평균기온 두 번째의 극값을 기록했다.

 

② 지구 기온인 2℃가 오르면 중국 북부와 남부에 대가뭄과 대홍수가 닥치고 바다 근처 도시들은 해수면 상승으로 서서히 가라앉는다고 한다. 아프리카에서는 4~6천만 명이 말라리아에 걸려 죽게 되고 바다 근처에 사는 1천만 명이 홍수로 고통을 겪게 되고 열대지방 농작물의 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든다고 한다.

3℃가 오르면 지구온난화가 심화되면서 열대와 아열대 지역의 주민 수십억 명이 가뭄과 기근으로 고통 받는다고 한다. 1억 5천~5억 5천만 명이 굶어 죽고 심한 가뭄이 일어나며, 열대우림이 사라지고 20~50% 정도의 생물이 멸종된다고 한다.

4℃가 오르면 남극의 빙하가 완전히 붕괴되면서 지구 전역에 피난민이 넘치고 앞으로 2천 년간 남극 얼음이 녹으면서 4.8m, 열팽창이 1.7m, 산악 빙하와 크기가 작은 만년설(빙원)이 45cm만큼 각각 해수면을 높일 것이라고 한다. 이 시나리오에서 그린란드는 해수면을 2.1m 높일 것으로 예상됐으나, 만약 앞으로 수천 년에 걸쳐 그린란드의 얼음이 모두 녹는다면 4.9m 추가로 상승할 가능성도 있다.

 5℃가 상승하면 북극과 남극의 빙하가 모두 사라지고 6℃가 오르면 산소의 순환이 중단되면서 마침내 인류는 멸종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20세기에 들어서 해수면은 약 10~25㎝가 상승하였고, 1950년 이후 북반구에 있는 빙산은 약 10~15%가 감소했다. 투발루의 경우 해수면 상승으로 이미 국토의 상당 부분이 물에 잠긴 상태로 지금도 매년 약 0.5~0.6㎝씩 물에 잠겨 가는 중이고, 이 속도라면 투발루는 이르면 50년 이내에 지도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고 한다.

해수면이 1m 가량 상승하면 대양의 섬나라와 해변의 도시가 침수돼 전 세계 인구의 10%에 달하는 6억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특히 저지대 상당수가 바다에 잠기게 돼 인류의 안전이 위협에 처하고, 전 세계는 홍수뿐만 아니라 가뭄과 질병 등에 시달리게 된다고 한다.
미국 애리조나주립대(UA) 연구진은 금세기 말까지 지구 해수면이 약 1m 상승할 경우, 미국 180개 주요 해안 도시의 육지 가운데 9%가 물에 잠길 것이고 세계적인 휴양지로 각광받는 대양의 섬나라들은 세계지도에서 아예 사라지게 된다.

한반도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과 생태계 파괴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어 해양환경관리공단의 해수면 모의실험에 따르면 해수면이 0.5m 상승할 경우 여의도 면적의 11배에 달하는 49㎢가 물에 잠기고, 이재민은 약 1만4000명에 달하게 된다. 한반도 해수면이 평균 1m 높아질 경우에는 이재민이 9만 명에 달하고, 여의도 면적의 33배에 달하는 국토가 물에 잠긴다고 한다.

채식 운동의 한계

초록 사회 l 2013. 7. 24. 16:18

어쩌면 나는 20여 년 지켜 온 채식을 포기하고 육식을 다시 시작할지도 모른다.
나는 인간에 대한 신뢰감을 점점 잃어가고 있으며, 이제 내 자신에 대해서도 굳이 스스로 인간임을 자부하며 존엄스럽게 살기를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니...

혹시 당신은 죽어가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을 그냥 구경만 하고 있던 적이 있는가? 나는 그 경우에 말 그대로 방관만 하고 있었다.

몇 년 전이었다. 내가 홍천에서 일하고 있었을 때였다. 내가 일하고 있던 곳 바로 앞에는 홍천강이 있었는데 갑자기 웅성거리며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었다. 나도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가 보았다. 강물이 급하게 흐르는 곳에 한 남자가 떠밀려 내려가고 있었다. 물에 가라앉았다 떴다 하는 와중에도 그는 갖가지 욕을 하며 자신은 수영을 못하니 구해 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구경만 하고 있었고 한 남자가 래프팅 보트를 타고 구하러 가고 있었다.
그런데 보트가 커서 혼자 한쪽에서 노를 젓느라 보트는 뱅뱅 돌기만 하고 중간쯤에서 잘 나아가지 않았다. 그가 조금만 침착해 한 사람을 더 태우고 갔더라면 아마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언덕 위에 있던 나는 뛰어들어가 사람을 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면서
수영을 잘한다는 형이 어디 있나 살펴보았다. 그 형은 보트가 떠 있는 물가 쪽에 있었다. 그런데 그 형도 다른 사람처럼 구경만 하고 있었다. 물살이 무척 빨랐으므로 아무도 맨몸으로 물에 뛰어들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일 뛰어든다면 그것은 바로 자살 행위나 다름 없었다. 비록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이라할지라도.

그때 구해 달라고 소리만 치던 두 남자가 작은 바나나 보트를 타고 노도 없이 그를 구하러 간다고 뛰어 들었다. 그들은 물에 빠진 남자의 친구로 보였다. 하지만 작은 바나나보트에 억지로 매달려 타고 내려가는 그들의 행동은 무척 위태로워 보였다. 그들은 바나나 보트에서 떨어질 것 같자 수영을 못한다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그들도 먼저 물에 빠진 친구와 같이 물에 떠내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먼저 물에 빠진 남자는 결국 가라앉고 말았지만 다행히 래프팅 보트가 이미 아래쪽에 와 있던 관계로 친구를 구하러 간 두 남자는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그날 나는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을 무기력하게 바라만 보고 있던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자살 행위를 범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변명으로 스스로를 위로할 뿐이었다. 그런데 물에 빠진 사람이 만일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라면 나는 과연 어떻게 행동했을까. 구경만 하고 있던 사람들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물에 빠졌다면 과연 어떻게 행동했을까. 친구를 구하러 간 두 사람처럼 어릭석은(?) 행동을 했을까...

그리고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상을 살면서 위대한 삶을 사는 것도 좋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아니 한 생명이라도 죽어가는 목숨을 살리면 자신의 인생은 충분히 값진 것이 아닐까. 우리가 동물인 이상 우리의 삶은 수많은 생명의 희생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희생되는 생명 이상의 생명을 살리는 삶을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아직까지 우리는 문명이라는 것을 믿고 있는가? 이성이라는 것을, 도덕성이라는 것을 믿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위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이라크 전쟁은 물론 최근까지 인간에 의한 대량학살은 계속 자행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또 그럴 것이다. 바로 우리가 그 일이 전혀 우리와는 별개인 일인 것처럼 방관하고 있을 때 우리의 이웃은 우리의 다른 이웃을,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몰살하려고 할 것이다. 캄보디아에서, 이라크에서, 르완다에서, 보스니아에서, 아프카니스탄에서 인종청소가 일어나고 있을 때, 자신이 살기 위해서 이웃을 보호해 주기는 커녕 자신의 친척까지 고발할 수밖에 없었을 때, 어떤 동물도 따라갈 수 없는 잔인함으로 시체에까지 폭력을 가해지고 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이성을 잃고 집단적인 광란에 휘말려 있을 때, 그들의 이웃나라에서는, 세계의 리더라는 미국에서는, 한국에서는 그것을 막기 위해 어떤 일을 했는가.

우리의 이해와 직접적으로 관계된 일이 아니기에, 우리에게 피해가 올지도 모르기에 우리는 방관하고 있지 않았는가. 우리가 국가가 잘못하고 있는 일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면 우리가 국가의 잘못에 동조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을까. 내가 직접한 일이 아니므로, 내가 직접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내 의지와는 관계가 없으므로 우리에게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일 지역 감정이라는 것이 극대화되어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대량학살하게 되었고 당신이 어느 쪽이든 소속되었을 때, 당신의 가족이 가해자가 되었을 때, 당신은 장담할 수 있는가 당신의 목숨을 담보로 가족의 잘못을 비판하고 그들의 행동을 막으려 할 것이라고.

나는 솔직히 대부분의 사람을 믿을 수 없다. 그런 일을 생각할 때 끓어 오르는 나의 분노를 보면서 어쩌면 내 자신도 그들과 똑같은 인간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만일 내 아버지가 나찌당의 열렬한 옹호자로 나서서 홀로코스트를 자행하고 있고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과연 나는 내 아버지의 일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까. 그로 인하여 내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는?

나는 생명, 특히 동물의 생명을 인간의 것과 다르지 않다는 관점에서 채식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분명 채식 운동을 하는 나는 최소한 사육되는 동물에 대해 인간의 대량학살에 반대하듯 그들의 생존권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가족에게조차 육식을 저지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안하고 있다. 가족간의 불화가 무서워서, 사람들이 나를 거북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 두려워서, 사회로부터 소외될지도 몰라서, 바로 내 자신을 위해서 나는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생명에 대해, 동물의 생존권에 대해 나는 부끄럽게도 적당히 그 소중함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모든 생명은 다 같이 소중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을, 이웃보다 내 가족이 더 소중히 생각하듯 동물보다도 지구의 재앙이라고 할 수 있는 인류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간의 목숨에 비해 다른 동물의 목숨을 하찮게 생각하고 다른 적대적인 인종이나 종교인들의 목숨을 하찮게 생각하고 동물이나 다른 인종에 대해 잔인한 폭력으로 생명을 빼앗아 갈 때, 가해자가 나와 가까운 사람일 때, 그들의 행위를 저지할 때 나까지 피해자가 될 수 있을 때, 과연 나는 그들을 저지할 용기가 있을까. 지금의 내 실천력으로 보아 나는 그런 용기도 없는 비굴한 인간임이 자명하다.

자유언론이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어떤 형태의 권력 앞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장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모든 개인이 자유언론인이 되었을 때 진정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나는 감히 불완전한 실천으로 완전한 사회를 외치고 있다. 분명 사람들에게 완전한 사회를 이룰 것을 요구할 자격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나 나는 분명 외쳐야만 하는 것이다. 누군가 완전한 실천가가 나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우리에게 잠재된 폭력성과 대량학살의 두려움으로부터 나를 그리고 우리 자신을 구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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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06년 경에 쓴 글이다. 이후 변화가 있다면 좀더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것과 장기와 시신을 기증하고 매번 헌혈을 계속하여 현재 30번이 넘었다. 내가 나눌 수 있는 육체로 최소한 한 명을 살릴 수 있다면 그 것 하나로도 내 삶은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달 1일 단식을 하여 구조적 착취를 당하는 제3세계와 하루라도 함께하고 그 날의 밥값과 동전을 모아 주로 제3세계 어린이를 후원하고 있다.

-2005년에 녹색연합에 썼던 글입니다. ^^;

만일 내가 보육원 아이들에게 최신 휴대폰을 하나씩 사주자는 캠페인을 제의한다면 대부분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너무도 눈에 선합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사치가 아닐까요?"
등등...
어쩌면 너무 당연한 반응이기에 나는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바엔 차라리 모두 가난해져 상대적 빈곤을 없애자고 주장합니다.

사회 복지 시설에 가 본 사람들 중에는
"우리집보다 좋네요."
"이런 데 말고 더 불쌍한 데 없어요?"
이런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고 합니다.
흔히들 매스컴을 통해 보여지는 보육원이나 지체장애인들은 울음바다를 만들어냅니다.
어느 복지 시설이나 기관에도 대표(?)로 불쌍해 보이는 아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처음엔 매스컴을 타기 싫어했던 이 아이들도 나중엔 매스컴을 즐길 줄 알게 된다고 합니다.
사회복지사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어디다 다 헐어가는 집을 얻어 얼굴에 때가 더덕더덕하고 꾀죄죄한 아이들을 살게 한 다음 후원을 원하는 사람들을 견학시키자고.
그래야 사람들은 후원하는 것을 보람있게 생각할 거라고.

지금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아픔의 원인은 절대적 빈곤이나 박탈감보다는 상대적 빈곤이나 박탈감 때문입니다.
그나마 시설은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모든 청소년들이 갖고 있는 휴대폰을 보육원 아이들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한참 정서적으로 민감한 나이의 그들이 느끼는 소외감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시설에서 봉사를 끝낸 후 그냥 가기에 미안해 햄버거 하나씩이라도 사주고 싶은 마음에 뒷풀이 얘기를 꺼냈다가 갈비를 먹으러 가자는 아이들 말에 황당해 했던 봉사자들...
그렇게 느끼는 게 당연한 것이라구요?
만일 그게 당신의 아이들이었다면 황당해 했을까요?

우리에게 봉사라는 것이 사회 소외층에 대해 우리보다 못 사니까, 불쌍한 존재이니까(아마 밥 먹고 살기도 곤란한 정도로 --;) 우리에게 남는 시간과 돈을 가지고 겨우 먹고 살게는 해주는 한도 내에서 후원을 해 줘서 우리에게 감사함을 느끼도록 하여 상대적 우월감이나 행복을 즐기자는 것인가요?
이것은 그들이 정녕 필요로 하는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아닌가요?

우리는 사회 소외층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가요?
너희들은 스스로 밥 먹고 살기도 힘드니까 우리에게도 아까운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이 정도로 해주는 것도 고맙게 생각해야 해!
너희들은 사회에 공헌한 것도 없고 우리들이 내는 세금으로 살아야 하니까 우리보다 좋은 시설에서 우리보다 잘 먹고 우리가 누리는 것을 똑같이 누려서는 안돼!

제로섬의 경제학으로라면 우리의 풍요는 타인의 빈곤을 바탕으로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나눠줘야 할 몫을 착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이익의 분배 문제뿐 아니라 그들에게 일자리나 기회 등을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그러면서 우리는 당연히 분배되야 할 그들의 몫을 봉사나 후원이라는 이름으로 적당히 나눠주면서 스스로 만족해 하는 것은 아닌가요?
우리나라처럼 경제가 수출을 바탕으로 한다면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지금 우리나라는 절대적 빈곤자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절대빈곤은 생각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풍요롭습니다.
우리 경제가 얼마간 위축된다 해도 우리는 절대적 빈곤을 없앨 정도로 풍요롭습니다.
상대적 빈곤자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이대로라면 난 차라리 우리 모두가 절대적 빈곤은 벗어나는 한에서 모두 가난해짐으로써 상대적 빈곤을 없애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물론 모든 봉사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 봉사나 후원에 대한 일반적 사람들의 생각을 바탕으로 우리사회의 문제점을 짚어보았습니다.
녹색연합도 사회 봉사 단체라 할 수 있겠죠.
녹색연합의 강령 중에는 사회 약자의 권익을 신장을 위해 노력한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 그 부분의 활동이 가장 미약한 것 같습니다.
사회적 약자가 왜 생겨나고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는지 불가항력이라면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줄여나가며 어떻게 하면 최소한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지에 대한 활동도 해야만 한다고 봅니다.

크리스천 슈피엘 저 '食人의 세계' 중에서

 

* 마요족의 젊은이는 세례 받은 일을 후회했다. 자신의 주검이 사랑하는 사람의 뱃속에 들어가지 않고 구더기의 밥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 아마존강 상류의 켄니벌리족 이야기
드디어 마지막 날이 왔음을 통보받자 노인은 이제 친구들과 재회할 수 있다고 하며 기뻐한다. 준비를 위한 사흘 동안의 여유가 주어지고 그것이 지나면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 곤봉으로 얻어맞아 죽는다.

 

* 남아메리카 거주 우카야리 족의 관용구
차디찬 흙 속에 묻히기보다는 따뜻한 친구 속에 묻히는 편이 낫다.

 

* 니그로인 자신의 어린이를 먹는 하이티의 한 사람은 自然法을 응용했다.
"나를 제쳐 놓고 그 누구에게 그렇게 할 권리가 부여되어 있단 말인가요?"하고 그녀는 논증했다. "낳은 것은 내가 아니던가요?"

 

* 남아메리카의 미란하 족의 한 추장의 말
"당신들 백인은 악어도 원숭이도 먹으려고 하질 않는다... 이런 것은 모두가 습관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적을 타살하면 그것을 썩히는 것보다는 먹어치우는 것이 좋지 않은가. 가장 나쁜 것은 먹히는 일 없이 죽는 것이다!"

 

* 아프리카 바그와 족은
"우리는 모든 것 중에서 최고의 인육을 먹고 있는데 당신들은 그것보다 훨씬 뒤치는 동물을 먹고 있다." 그리하여 뛰어난 식품 문화를 자랑스럽게 의식하며 "타락한 것은 당신들이며 우리가 아니다."라고 결론을 지었다.

 

* 쿠크의 항해에 수행한 독일인 게오르그 포르스터는
"인육을 먹는다는 것이 제아무리 우리 교육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해도 그 자체는 반자연적인 것도 아니며 처벌될 성질의 것도 아니다. 다만, 인간애, 동정 등의 인간 상호 감정이 그것으로 해서 잃어질 우려성이 있다는 이유로서만 추방되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 문명의 영역에서 인간의 제물(어떻게 정당화되든)이 오랫 동안 계속되고 폭력에 의한 죽음과 잔혹함이 좀처럼 근절되지 않았음을 보면 실제로 식인족에 대해서 노여움을 지니게 될 동기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다는 것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던가 하는 추측이 남는다.

 

* 헤로도토스 '역사' 제 3권
'모든 민족이 자신의 생활 양식을 최상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막판 6일! 6월12일부터 17일까지! 현재까지 3,000여명, 앞으로 7,000여명을 더! “온라인으로” 군형법 제92조의 6 폐지를 위한 1만인 입법청원에 참여해주세요 이름과 주소만 입력, 아주 간단합니다! http://lgbtact.org/?p=382 부탁해요~
하시모토 오사카 시장의 위안부에 관한 망언, 그가 일본의 차세대를 대표하는 젊은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더욱 더 놀랍다. 이 사건을 통해 여성을 비하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경향이 일본의 구세대 정치인들에서 끝나도록 하자 -- 지금 이 청원서에 나와 함께 서명! -- https://secure.avaaz.org/kr/hashimoto_comfort_women_a/?dnZtZc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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