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주의(녹색주의)

[인권연대 회원모임 3탄] "한겨레 영화 담당 이재성 기자와 함께하는 영화 여행"  

 인권연대가 ‘야심차게' 진행하는 한겨레 영화 담당 이재성 기자와 함께 하는 영화 모임이 3월 행사를 엽니다. 3월 2일(월) 저녁 7시, 인권연대 교육장에서 수오 마사유키의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를 함께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누구나 함께 하실 수 있는 자리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 일시 : 2009년 3월 2일(월) 저녁 7시
  • 장소 : 인권연대 교육장(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2분거리)
  • 문의 : 인권연대 사무국(02-3672-9443)

영화 정보

INFORMATION
영어제목 : I Just Didn't Do It
원제 :
'소레데모 보끄와 얏테나이'(それでも ボクは やってない)
감독 : 수오 마사유키
주연배우 : 카세 료, 야쿠쇼 코지
제작사 : 서울엠피필름(주)  제작국가 : 일본
상영시간 : 143분

CAST
카네코 텟페이 역 : 카세 료 Ryo Kase
스도 리코 역 : 세토 아사카 Asaka Seto
사이토 타츠오 역 : 야마모토 코지 Kohji Yamamoto
카네코 토요코 역 : 모타이 마사코 Masako Motai
아라카와 마사요시 역 : 야쿠쇼 코지 Koji Yakusho

SYNOPSYS

국가권력에 맞서는 한 개인의 팽팽한 대립

카세 료가 연기하는 청년이 치한으로 몰린 사건을 통해 일본 사법제도의 문제점을 파헤치는 정통 사회 영화

직업을 구하는 중인 가네코 텟페이는 회사 면접을 보러 만원 전철을 탔다가 치한으로 몰려 현행범으로 체포되고 만다. 텟페이는 경찰 조사에서 혐의를 부인하고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담당 형사는 자백하라는 추궁 뿐, 결국 구치소에 갇히고 만다. 구치소에서 생활하며 고독감과 초조함에 시달리는 텟페이.

검찰로 넘어간 텟페이는 담당 검사의 취조에서도 역시 무죄를 주장하지만 인정 받지 못해 결국 기소되고 만다. 형사 사건으로 기소되는 경우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을

확률은 99.9%라고 한다. 그런 텟페이를 변호하기 위해 나선 것이 베테랑 변호사인 아라카와 마사요시와 신참 여변호사인 스도 리코였다.  

피해자와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치한범으로 고발된 용의자를 변호한다는 것을 꺼려하는 스도. 그러나 아라카와는 무고하게 치한범으로 재판에 회부된 사건이야말로 일본 형사재판의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내는 지점이라면서 사건에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재촉한다. 그리고 텟페이의 어머니 토요코와 친구 사이토 타츠오도 텟페이의 무고함을 믿고 행동을 시작한다. 얼마 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재판이 열린다.

-같이 생각해봐요-

1.무죄 추정의 원칙을 둘러싼 논란
2.재판제도의 관료화와 사법 정의 실종
3.피의자의 인권


숨은 가세 료 찾기 지수 ★★★★★
법정 방청객 대리 체험 지수 ★★★★★
러닝타임 체감 지수 ★ 

일본의 형사사법재판에는 폐해가 있다. 무죄라는 가정 아래 피고인을 조사하는 무죄추정이 원칙임에도 체포 즉시 피고인은 관행상 유죄로 인식되고 인질사법으로 구속된다. 피고인이 죄를 벗으려면 법정이라는 국가권력에 맞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권력의 벽은 높고 견고하다. 그 지루한 싸움의 승률은 0.1%가 채 안된다. 수오 마사유키 감독은 긴 인고 끝에 무죄판결을 받은 어느 치한사범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접하고 그 길로 영화화를 결심한다.  

26살의 텟페이. 고정직 없이 아르바이트로 지내오던 그는 중요한 면접이 있던 날 아침 만원전철을 타게 됐고, 그때 문에 옷이 끼어 빼려고 몸을 움직이다가 치한으로 몰린다. 경찰은 현행범으로 구금된 텟페이를 범인으로 단정짓고 그를 감금한다. 결국 사건은 검찰로 넘어간다. ‘자백하면 쉽게 끝날 일'이라는 주변의 권고에도 텟페이는 줄곧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다. 텟페이의 결백을 믿는 엄마와 단짝 친구 다츠오는 변호사 아라카와 마사요시와 스도 리코에게 텟페이의 사건을 의뢰, 무죄를 입증하기 위한 지루한 싸움을 시작한다.  

수오 감독은 텟페이의 무죄를 조장할 만한 어떤 영화적 장치도 허용하지 않는다. <으랏차차 스모부> <쉘 위 댄스> <팬시 댄스>로 이어지는 수오 감독의 웃음코드, 개성있는 캐릭터는 모두 빠진다. 또한 관객이 캐릭터에게 심정적 동요를 불러일으킬 만한 여느 법정영화의 회상장면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143분의 긴 러닝타임을 꽉꽉 채우는 것은 철옹성 같은 국가권력에 맞서 무죄를 입증하려는 한 개인의 팽팽한 대립뿐이다. 무표정하고 암울한 영화의 분위기는 관객을 법정의 방청석으로 데려가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삼엄한 공간, 성추행범으로 몰린 텟페이를 변호하는 건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판결이 진행되는 동안 관객의 심경은 신기하게도 무죄를 호소하는 텟페이에게 가닿는다. 절제된 감정으로 수오 감독은 제도의 모순이라는 간과할 수 없는 진실을 설파한다. 가세 료라는 명배우의 입을 빌려.

tip /영화에는 텟페이의 친구가 재판을 메모하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일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법정 안에서 방청객의 메모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재판을 방청하던 한 외국인이 부당함을 제기했고 뒤늦게 실행됐다. 일반 국민이 재판관과 책임을 분담, 협동하여 재판내용의 결정에 주체적, 실질적 관여를 할 수 있는 재판원제도(일종의 배심원제도)는 2009년 5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출처 -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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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토르 하라 음반 세 개의 내용

Victor Jara 1967- El Verso es una paloma

Victor Jara 1970 - Canto libre

Victor Jara 1971 - Derecho de Vivir en Paz (ver[1]. 2001)

2예수님이 벳새다에서
빵 두 조각과 물고기 다섯 마리로
오천 명을 먹였던 것처럼
당신도 한끼 식사 값으로
아프리카 어린이 오십명에게
한끼의 식사를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이들의 비만을
걱정하고 있는 중에도
지구촌에서는 매일 삼만 오천 명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중 대부분은 어린이들입니다.

한국전쟁 직 후
우리도 선진 외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은 어른이 된 많은 어린이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갔을 것입니다.

생명은
한국에서도 아프리카에서도
소중한 것이며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소중한 것입니다.

지금 꺼져가고 있는 생명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십시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작은 사랑으로도
기적을 행 할 수 있습니다.

옛날 카피라이터 학원에 다니면서 썼던 공익 광고 글이다.
카피라이터를 시작하기엔 적지 않은 나이에 배웠기에
그 분야로 취업이 되진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다행한 일이다.
공익 광고를 제외하고는 광고가 단지 상품의 정보를 알리는 데 있지 않고
불필요한 소비를 조장하는 자본주의 꽃의 유혹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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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스볜낼坪?어울려 살았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도 현대 사회보다 훨씬 덜했고, 가급적 직업을 갖고 자립할 수 있도록 독려하였다. 전통사회는 가족을 단위로 살아가는 가족사회였다. 당시 가족은 생산과 소비의 단위이자, 사회활동과 교류의 단위였다. 이에 따라 정부의 각종 복지정책, 예컨대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 등 이른바 ‘환과고독鰥寡孤獨’에 대한 부양을 가족이 일차적으로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마찬가지 장애인 복지정책도 ‘가족부양’을 원칙으로 삼은 채, 해당 가족으로 하여금 장애인을 책임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기근이나 전염병 같은 자연재해로 인해 가족한테 문제가 발생하면, 그 이웃이나 친척 등 마을공동체에서 지원해주도록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가 가족들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고 마냥 수수방관만 했던 것은 아니다. 전통시대 장애인 복지정책도 현대에 비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은, 아니 오히려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체계적인 조선의 장애인 지원 정책
조선 정부는 장애인을 ‘자립 가능한 사람’과 ‘자립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나누어 지원정책을 펼쳤다. 예컨대 정종 2년(1400) 7월, 임금이 정전에 나아가 이렇게 지시한다.
“환과고독과 노유老幼, 폐질자(장애인) 가운데 산업이 있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자를 제외하고, 궁핍하여 스스로 생존할 수 없는 자는 소재지 관아에서 우선적으로 진휼하여 살 곳을 잃지 말게 하라.”
먼저 자립 가능한 사람은 대표적으로 소경, 봉사, 맹인 등으로 불린 시각장애인을 들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이들은 주로 안마 같은 업종에만 종사하지만, 전통사회에선 점占을 치는 점복, 경經을 읽어 질병을 치료하는 독경,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 같은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자립, 곧 스스로 먹고 살았다(이들 직업은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상당히 대우 받는 직업이었다).
특히 정부는 그들 시각장애인을 위해 따로 명과학이나 관현맹인 같은 관직제도를 두어 정기적으로 녹봉과 품계를 올려주었다. 또 우리나라엔 지금으로부터 벌써 6백년 전인 태종, 세종 때에 세계 최초의 장애인 단체인 명통시明通寺가 있었는데, 이는 서울 5부의 시각장애인이 모여서 조직적으로 활동하는 단체였다. 명통시는 조선 정부가 시각장애인을 위해 특별히 설립한 것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는 엄연한 공적기관이었다.
다음으로 자립하기 어려운 사람은 거동이 힘든 각종 중증장애인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구휼이나 진휼, 진제 등의 명목으로 국가에서 직접 구제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고대로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져왔다. 특히 당시 임금들은 왕위에 오를 때나 흉년이 들어 살기 어려울 때, 그리고 평상시에도 자주 환과고독과 함께 장애인을 우선적으로 구제하도록 신하들에게 당부하였다. 이밖에도 정부는 장애인을 위해 다양한 지원정책을 펼쳤다. 조세와 부역 및 잡역을 면제하고, 죄를 범하면 형벌을 가하지 않고 포布로써 대신 받았으며, 연좌죄에도 적용하지 않았다. 또한 시정侍丁, 곧 부양자를 제공했고, 때때로 노인과 함께 잔치를 베풀어주며 쌀과 고기 같은 생필품을 하사했다. 기타 동서활인원이나 제생원 같은 구휼기관을 설치하여 위기에 처한 장애인을 구제하였다.
이렇게 장애인을 다각적으로 지원하고 공동체 내에서 인간답게 살도록 했기 때문인지, 뚜렷이 두각을 나타내거나 사회에 공헌한 장애인들이 매우 많았다. 대표적으로 세종 때 우의정과 좌의정(오늘날 국무총리격)을 지낸 허조는 등이 굽은 척추장애인(이른바 곱추)이었고, 숙종 때 우의정이었던 윤지완은 한쪽 다리를 절단한 지체장애인이었으며, 연암 박지원의 작품 <허생전>에서 주인공 허생이 꼽은 17세기 대학자 졸수재 조성기 역시 등이 굽은 척추장애인이었다. 이밖에 18세기 화가 최북이나 조선 중기의 음악가 김운란 등 장애인 예술가도 대단히 많았다.
전통시대 장애인은 단지 몸이 불편한 사람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당시엔 장애인이라 하여 천대받지 않았고 자신들의 특성에 맞는 직업이 주어졌으며, 양반층의 경우엔 과거를 보아 높은 관직에 오를 수도 있었다. 나아가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면 때때로 이름난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즉, 그들은 엄연한 사회의 한 일원이었던 것이다.



▶글·사진_ 정창권 고려대 국문학과 강사

 



이명박 정권 용산 살인진압 규탄 및 열사 추모
범국민 추모대회
- 2월 21일 범국민 추모대회(장소: 서울 도심 등)
- 2월 28일 10만 범국민 추모대회(장소: 서울 도심 등)

함께합시다!
- 매일 저녁 7시, 청계광장에서 열리는 촛불추모대회에 참여합시다!
- 순천향병원 혹은 용산참사현장에 마련된 분향소 조문에 함께합시다!
- 모금에 동참해주세요!
부상자 치료, 유족 및 구속자 지원, 추모대회 운영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됩니다.
* 후원계좌: 농협 067-02-302163(이종회)




- 2월 16일, 28일차 촛불 추모대회 소식 보기
- 2월 16일, 범대위 대변인실 기자브리핑 보기


용산 범대위(mbout.jinbo.net)

안녕하세요, 도시빈민운동카페 지기 신희철입니다.

현재 용산범대위 선전팀에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범대위에서 제작한 용산의혹, 철거용역 실상 등 괜찮은 이미지들이 있어 전체메일로 발송합니다. 참고하세요~

 

* 문의: 신희철 011-9728-7418, commune96@hanmail.net

 

>> 용산의혹(출처: 용산범대위)

 

>> 철거용역 실상 관련 선전판 이미지

 
 


이스라엘의 가자 공습이 남긴 것 /서아시아

이스라엘의 가자 공습은 가자 점령지의 150만 팔레스타인들의 삶을 뒤바꾸었다.

입력: 09-01-29 14:15

가자에 사는 나의 삼촌과 숙모, 사촌들이 실종된 지 2주가 넘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배관공 죠Joe”로 알려진 사무엘 부르젤바허 때문이다. 그는 대통령 당선자였던 버락 오바마를 문제삼는 바람에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인물, 그가 이스라엘의 남부 스데롯에서 활동하는 소위 ‘종군기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담당구역에서 더 가디언지와 통화하던 그는 스데롯 주민들의 삶이 얼마나 더 어려워질 것인지에 대해 언급했다.

“스데롯 사람들의 하루하루는 일상적인 것들을 꿈꾸기 어려운 나날들입니다. 곧 로켓이 머리 위로 떨어질까봐 공포에 질려있는데, 샤워하다 비눗물이 눈에 들어가거나 하는 일이 생기겠습니까? 하더라도 황급히 물 한번 끼얹고 말겠지요. 저라면 분명 그럴 겁니다. ”  

가자 사람들의 하루하루 삶에 대해 부르젤바허는 도대체 뭐라고 말할지 알고 싶다. 이미 물탱크도 말라버리고 전기도 끊어진 지 오래인 그들의 삶에 대해 말이다. 그곳엔 최근의 이스라엘 맹공으로 160쉐켈(약 40불)까지 급등한 밀가루를 어떻게든 사보려고 난리인 형국인데...

또 하나 궁금한 게 있다. 최근에 가족의 잠자리를 놓고 아내와 다투던 우리 삼촌을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이스라엘이 지난 12월 27일 군사작전을 펼치기 시작했을 때, 숙모는 집이 폭격을 맞는 것에 대비 죽더라도 같이 죽어야 한다며 한 방에 모여 자고 싶어 했다. 그러나 삼촌은 가족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살아남으려면 흩어져 자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스라엘 폭격에 불타고 있는 가자>


부르젤바허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간의 갈등의 본질을 잘 모르거나 혹은 애써 무시하려는 많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다. 가자에 대해 이스라엘 사람들의 감정이 폭발한 것은,  우리 신출내기 기자가 우리를 설득시키려한 것처럼, 단순히 이스라엘의 집들에 로켓이 떨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길고 긴 이 관계에서 맨 처음 과연 무엇 때문에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로켓을 쏘게 만든 것인 지, 부르젤바허는 한번이라도 자문해 본 적이 있을까?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이 로켓이 발포되는 상황 하에 놓이게 된 것은 지난 41년간 그들의 정부가 팔레스타인들을 향해 점령과 인종청소 정책을 추구해왔기 때문이다.

실로 비이성적이고 위선적인 것은 가자점령지구나 웨스트뱅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그들을 전멸시키려는 것에 대해 저항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곳에 아쉬켈론과 스데롯같은 그들의 마을을 세우고 그곳에 살아왔던 많은 팔레스타인들을 난민이 되게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종종 사용하는 진부한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어느 누구도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을 공격하는 이들을 참아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들에게 기대하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국면에서 하마스가 나타나기 오래전부터 이스라엘의 인종차별 정책은 웨스트뱅크나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들의 삶을 견딜 수 없는 지경으로 모든 걸 내몰았다는 사실은 결코 잊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인종차별 정책은 역사적으로 일찍이 그곳의 원주민이었던 팔레스타인인들을 그곳에서 내몰기 위한 한 방책이었다.

이스라엘의 인권단체인 벳셀렘에 따르면, 1967년부터 2007년까지 이스라엘은 웨스트뱅크에 121개의 정착촌(*점령촌)을 세웠고 추가로 100개의 불법적인 전초지를 세워 유대인 극우파들이 정착해 살도록 했다는 것이다. “1967년엔 그중 12개 정착촌(*점령촌)을 이스라엘에 붙어있는 곳에 지어 마침내 예루살렘의 일부로 편입시켰다”고 그 단체는 말한다. 심지어 지난 해 평화협정에 대한 타협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안에도 이스라엘은 새로운 정착촌(*점령촌)을 짓고 또 계획하느라 분주했다. 어떤 팔레스타인인도 이들이 짓는 배타적 유대 식민지에 들어갈 수 없다. 그곳은 이스라엘 군인들에 의해 삼엄하게 통제되는 곳이다. 팔레스타인인은 어느 누구도 그곳에서 다른 몰수된 팔레스타인 땅에 지어진 정착촌(*점령촌)들로 이어지는 길들을 사용할 수조차 없다.

웨스트뱅크를 뱀처럼 둘러싸고 있는 인종차별 장벽을 세움으로써 이스라엘은 독립적인 인접국으로서 팔레스타인 국가의 가능성을 묵살하려 하고 팔레스타인 영토를 야금야금 먹어치우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인종차별의 유력한 상징으로서 이 장벽은 이미 국제사법재판소에 의해 불법이란 판결이 난 상태이다. 이산가족을 만들어내고 농부를 그들의 경작지로부터 격리시키고 병든 이가 병원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웨스트뱅크의 어디를 가더라도 팔레스타인인들은 반드시 무수한  검문소와 노상바리케이트들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러다보니 가까운 길을 나서도 엄청 시간이 많이 걸림은 물론 좌절과 모욕적 경험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 군인들 마음대로 자의적 구금이나 짐수색, 몸수색과 검문을 받을 수밖에 없다. 또 팔레스타인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면 특별허가증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웨스트뱅크와 가자에 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예루살렘 출입은 사실상 금지되는 것이다.

 
<한 팔레스타인 소년이 가족들과 함께 피난처로 삼은 가자의 유엔학교 담 뒤로 서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겐 또 통금이 있다. 어떤 경우 그것은 40여일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그 경우, 사람들은 가택연금상태에 놓인다. 당연히 그 기간엔 그들의 집을 짓거나 수리하는 것이 거의 허락되지 않는다. 만일 승인 없이 그랬다가는 그 벌로 그들의 집을 허물어 버린다. 또한 집단처벌 차원에서 이스라엘은 저항세력들로 의심되는 이들의 가족들 집 모두를 불도저로 밀어버린다. 대개는 어떠한 사전경고도 없이. 1967년 이래로 웨스트뱅크에서만 19,850채 이상의 팔레스타인인 가옥이 허물어졌다고 이스라엘 주택철거반대위원회(Israeli Committee against House Demolitions)는 밝히고 있다.

<귀향법>이라는 게 있다. 세상 누구라도 유대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면 이스라엘 시민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 법은, 나의 아버지 같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겐 그들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갈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자손에게도 그 법이 적용됨은 말할 것도 없다. 팔레스타인인의 이동은 이스라엘에 의해 면밀히 관찰되고 통제된다. 나의 사촌이 2주가 넘도록 실종된 상태다. 웨스트뱅크의 고향마을에 살기 위해 가자를 떠난 후. 짐작컨대 그는 단지 ‘방문’허가증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소위 ‘위반’죄로 체포되었지 싶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가 지금 어디 있는 지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고 있다.  

몇 페이지에 걸쳐 써도 모자랄 길고 긴 슬픈 이야기들. 그것들이 말해주는 것은 이스라엘의 압제에 저항하든 말든 어떤 팔레스타인인들도 점령상황 속의 의례적인 모욕과 폄하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부르젤바허, 그에게 좀 더 분명히 말하고자 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축출정책에 저항하는 것은 이처럼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차별과 모욕과 절망과 강탈의 통치때문이라는 것을! 그것은 마치 미국 원주민들과 남아프리카인들이 압제에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 같다. 

가자 맹공습을 기획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이스라엘의 국방장관 에후드 바락조차 이러한 사실을 인정한 적이 있다. 1998년, 이스라엘 일간지 하레츠와의 대담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내가 그럴 만한 나이의 팔레스타인인이었다면 테러단체의 일원이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이스라엘군이 제네바협정에 의해 금지된 백린탄을 이번 가자침공 내내 사용했다.사진은  베이트라히아에 있는 UNRWA학교 안으로 이스라엘군의 백린탄이 떨어지는 장면이다>

가자에 사는 가족들 가운데 팔레스타인인들을 섬멸하기 위한 이스라엘의 최근의 공격에서 몸과 마음이 다치지 않고 살아남은 이는 한 사람도 없다. 그들의 비범한 군사력 남용을 통해 이스라엘은 다음 세대 팔레스타인 저항 세력들의 씨앗을 심어놓은 꼴이 되었다. 그곳의 아이들이 목격한 것은 부모와 형제가 백린탄에 의해 그슬러지고 폭탄에 으깨지고 총알에 벌집처럼 되는 모습이었다. 설사 매맞고 굶어죽는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런 아이들이 굴종하겠는가! 팔레스타인인의 저항은 비폭력적으로든 폭력적으로든 계속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들의 철권을 펴고 정의와 평화에 동의하는 순간까지- 결국 팔레스타인인에게 정의는 이스라엘이 인종차별국가가 아닌 정상적인 국가가 되는 길 뿐이고, 그렇게 함으로써만 이스라엘은 진정 자국민의 안전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번역 : jeondodo
번역문 출처 : 팔레스타인평화연대
http://pal.or.kr/bbs/view.php?id=al_think&no=204
글 : Dalila Mahdawi, 레바논 데일리 스타의 기자
원문출처 : The Electronic Intifada
번역글 출처 경계를 넘어 :
http://www.ifis.or.kr/bbs/board.php?bo_table=news_main&wr_id=10804&PHPSESSID=aa5c3b9c643cbf616035bd25a5e18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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