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환경운동연합 월간지 '함께 사는 길'에서 채식에 대해 원고 청탁을 해서 글을 써서 실었습니다.
그 글을 전국국어교사 모임에서 출판한 '국어시간에 생각 키우기' 책에 수록했는데, 이번 2018년 개정 고등학교 교과서에 비상출판사 국어(박영민 저)에 일부 수록되어 글의 원문 올려봅니다.
한번 읽어보시고 채식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세요.^^
새우깡도 먹지 않는다고요-어느 채식주의자의 수기.pdf
새우깡도 먹지 않는다고요? 어느 채식주의자의 수기
▒▒▒ 1월에 대구에서 열린 '전국채식주의자모임'
“굶어 죽어도 고기는 먹지 않겠어요.”라고 어머니에게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육식을 거부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당시 사춘기로서 몽상을 즐겼던 내게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이었다. 중학교 때인가 “나는 고통스럽게라도 살고 싶지, 죽기는 싫어요.”라고 말했던 것도 기억난다. 그런 내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느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다른 사람들은 물론 동물들도 느끼고 있는 것 아닐까? 살고 싶어 하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고, 슬픔과 기쁨을 느끼는 것이 나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개는 물론 토끼나 닭 같은 동물도 길러보았기에 나는 동물들이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은 할 수 없어도 사람과 같거나 비슷한 방식의 감각과 감정을 가졌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른 물음이 일상생활, 내 자신의 실천에까지 가닿자 나는 더 이상 고기를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채식주의에 대한 흔한 오해
많은 사람들은 채식주의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 채식주의(vegetarianism)의 어원은 채소(vegetable)가 아니라 라틴어 ‘vegetus’로 ‘온전한’, ‘생기 있는’이란 의미를 가진다. 즉 채식주의자란 온전한, 생기 있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고 이들이 고기를 먹지 않는 식생활을 하기에 채식주의자(菜食主義者)란 말로 풀이된 것이다.채식을 시작할 당시에는 주변에 채식주의자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채식주의에 대한 어떤 정보도 얻을 길이 없었기에 나름대로 채식의 기준을 정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새우깡도 먹지 않는다고요?” 사람들이 흔히 놀라며 정말이냐는 듯이 묻는 말이다. 그러면서 이미 죽어 있는 것인데 먹지 않으면 쓰레기로 버려질 것이니 차라리 먹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직접 죽인 것이 아니고 죽인 것을 먹는 것은 청부살인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내 입맛을 위해 고기를 소비하는 것은 동물의 죽임을 촉진하는 것이며, 자신이 못하는 것을 남에게 시키는 것이므로 더욱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한다.처음에 나는 일체의 육류를 먹지 않는 순수채식주의자였지만 지금은 우유와 무정란은 먹는 유란채식주의자다. 무엇보다도 살생만은 안 되기에 동물을 죽여서 얻은 것은 먹을 수 없고 살아 있는 동물로부터 얻은 부산물은 먹어도 된다는 나름대로의 윤리관을 정했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음식을 요리해 먹을 처지도 안 되고, 나로 하여금 내 주변의 사람들을 너무 불편하게 하지 않는 사회적 마지노선이기도 하다.사람들은 보통 채식주의자들은 풀(?)만 먹고 사느냐고 묻고 또 주로 건강 때문에 채식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 채식을 꾸준히 하는 사람들은 건강보다는 생명 존중이나 환경 보호 등의 이유 때문에 채식을 한다. 그리고 채식주의자들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가죽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물론 벌의 노동력 착취라고 해서 꿀도 먹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순수한 채식만 한다. 육류나 어류 같은 고기는 먹지 않으나 나처럼 우유나 달걀은 먹는 사람들도 있으며, 생선 같은 어류까지 먹는 사람들도 있고, 닭고기 등의 조류까지 먹는 사람들도 있다. 닭고기까지 먹는 채식주의자를 반채식주의자(semi-vegetarian)라고 하는데 이는 최소한 우리와 닮은 꼴 영혼을 가진 돼지, 소, 개 등 포유류는 먹지 말아야 채식주의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온전하고 생기 있는 삶을 위하여
채식주의자들은 에스키모나 사막지대의 유목민들에게 채식만 하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내에서 다른 생명들을 가장 존중할 수 있는 음식을 권한다. 내 생명의 소중함을 알기에 다른 사람의 생명의 소중함도 아는 것이고, 동물의 생명도 소중함을 아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식물의 생명도 소중한 게 아니냐고 말한다. 나는 당연히 식물의 생명도 소중하며, 식물뿐 아니라 물과 공기, 흙 등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다 소중하다고 말한다. 그들이 있기에 나는 물론 우리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다른 생명보다 자신의 생명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을 우리는 숭고하다고 하는 것이다.소중한 자신의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생명체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생명체에 의지하여 우리의 생명을 유지해야 할까? 나는 이런 비유를 들곤 한다. 사과나무에서 떨어져 산산이 부서진 사과를 보면서 끔찍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져 골이 깨지고 내장이 터져 나온 것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엄청나게 끔찍함을 느낄 것이다. 아마도 비위가 약한 사람들은 토할 것이다. 우리와 비슷한 신체 구조를 가진 동물일수록 더 끔찍함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과연 우리는 둘 중 어느 것을 보고 식욕을 느낄까?어느 학자의 발표에 의하면 대부분의 동물들은 가능한 한 자신과 진화상 유연관계가 먼 생물을 먹이로 삼는다고 한다. 또 그런 동물일수록 장수한다고 한다. 신체 구조상 사람은 채식에 적합한 치아 구조와 긴 대장을 가지고 있고, 침에는 육식동물에는 없는 프티알린이라는 녹말을 소화시키는 효소가 있으며, 초식동물과 같은 담즙 분비와 혈액 중 간 단백질의 비율, 물 마시는 방법, 땀의 분비 등 육식보다는 초식동물의 특징을 갖는다고 한다.육식 문화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본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왜곡된 문화를 통해 학습된 산물이다. 인도의 최상위 계층인 브라만은 육식을 먹을 게 없어 아무 것이나 먹는 천박한 사람들의 음식이라고 한다. 그러나 미국식 문화를 받아들인 우리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고기를 많이 먹어야 미국 같은 선진국이 되고, 고기를 먹어야 힘을 쓸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육식 문화는 또한 실제 주영양공급원이 식물임에도 불구하고 수렵을 통해 특별한 음식인 고기를 얻어 힘을 과시했던 남성들에 의해 주도된 남성우월주의의 산물이기도 하다.무엇을 먹을 것이냐에 대해 우리는 분명 선택할 권리가 있으며,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음식들이 널려 있다. 그러나 선택에 앞서서 우리는 우리가 먹어야 할 음식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알 권리를 또한 가지고 있다.
▒ ‘베지투스’가 주관이 되어 치르고 있는 채식문화제 풍경
함께 살 준비가 되어 있나요?
단지 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로 채식주의자를 가늠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얼마나 온전하고 생기 있는 삶을 살아가느냐 또한 채식주의자의 중요한 잣대이다. 다른 사람, 다른 생명체를 존중하는 사람들은 전쟁에 반대하며, 다른 사람의 인권을 짓밟고 무시하거나 모든 생명의 터전인 지구를 오염시키고 파괴하는 행위에 저항할 수밖에 없으며, 이런 행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들이야말로 채식주의자라고 본다. 또한 그래야만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과 사람이 함께 살아갈 세상이 온다고 믿는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위해, 누구와 함께 살 준비가 되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