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주의(녹색주의)

10년도 더 된 일이다. 모임 구성원 중에 이천에서 비닐하우스 없이 유기농을 하는 농부가 한 명 있었는데 항상 판로를 걱정하고 있었다. 유기농산물 중에서도 비닐하우스를 하지 않는 경우 가격도 가격이지만 농산물의 품질이 고르질 않아 판로가 쉽지 않고 안정적으로 수입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모임에서 뜻 있는 사람들끼리 꾸러미 상자로 농사를 유지할 수 있게 지원하기로 했다. 당시 농부는 매달 25,000원을 내면 한 달에 한 번, 50,000원을 내면 한 달에 두 번씩 편지와 함께 꾸러미 상자를 보내주기로 했다.

처음 시작할 때는 구성원이 몰려 있는 서울의 일부 지역만이라도 한 곳에 직접 배달을 해서 근처에 사는 구성원들이 찾아가게 했다. 구성원과 농부의 직접적인 관계를 중요시하고 복잡한 유통으로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농부가 서울은 물론 수도권에 사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직접 배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에 최소한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천에서 서울로 배달 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시간에 농부가 쉬거나 농사에 더 집중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해 결국 모든 지역을 택배를 이용해 배달하기로 했다. 물론 택배를 보내는 것도 쉽지만은 않다. 보낼 때마다 편지를 쓰고 일일이 포장해야 하는 데다 택배비도 결코 싸지 않기 때문이다. 다행히 구성원 중에 박스를 지원해 주는 분이 있어서 포장비를 일부 아낄 수는 있었지만 말이다.

우리는 농부와 소비자와의 관계를 중요시해서 농사가 바쁠 때는 농활로 농사를 도와주러 가기도 했고, 농부가 식사 초대를 해 구성원들과 교류의 장도 갖기도 했고, 김장철에는 농가에 모여서 김장도 함께 담갔다. 하지만 겨울이 찾아오자 문제가 발생했다. 비닐하우스를 하지 않는 농부가 생산할 수 있는 농산물이 없어서 꾸러미 상자로 보낼 것이 없어졌다. 결국 농부는 봄이 와서 정상적인 농산물을 보낼 때까지 돈을 받지 않겠다는 편지를 넣은 꾸러미 상자를 보냈다. 하지만 우리가 꾸러미 상자를 시작한 이유는 농부가 지속적으로 농사를 짓게 지원하는 것이었으므로 대신 농산물이 많이 생산될 때 더 보내면 되니 부담 갖지 말라며 돈을 계속 보냈다.

다행히 꾸러미 상자가 지인들을 통해 조금씩 알려져 구성원들이 늘어 농부는 판로 걱정 없이 농사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구성원들 중에는 혼자 사는 사람도 있었고, 집을 며칠 비우는 사람도 있었다. 농산물이 많이 생산될 때는 혼자 사는 경우 보내온 농산물을 모두 처리할 수 없었고, 하루라도 집을 비워 꾸러미 상자를 제 때 받지 못하거나 하면 한여름에는 농산물이 시들거나 상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한 농가에서 생산하는 데는 품목이 아무래도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농부가 보내주는 대로 받기로 했다. 하지만 농부로서도 몇 가지 농산물만 생산하기에는 구성원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어서 최대한 다양한 농산물을 재배했다. 그러니 그만큼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구성원들마다 취향이 다르므로 좋아하는 농산물이 없을 때는 따로 사서 먹어야 했고, 구성원들마다 싫어하는 농산물들도 달랐다. 이웃이 있거나 친척이 가까이 사는 구성원은 친지들에게 남거나 안 먹는 농산물을 나눠줘도 되지만 가까이에 친자가 없이 혼자 사는 구성원들에게는 쓰레기에 불과했다.

겨울에 농산물을 보내주지 못하고 품목에도 한정적이라 농부는 결국 다른 농부를 섭외했다. 비닐하우스를 이용해 유기농을 짓는 농부였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들의 신념이 달랐기 때문이다. 꾸러미 상자를 처음 시작한 농부는 대충 다듬은 농산물을 그대로 보냈다. 그 대신 양은 많았다. 하지만 새로운 농부는 그렇게 보내면 구성원들이 손질하면서 버려지는 음식물쓰레기들이 나오므로 보내는 것을 씻기만 하고 바로 먹을 수 있게 손질해 보냈다. 깔끔했지만 양은 좀 줄었다. 나중에 참여한 농부는 처음 시작한 농부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고 마찰을 빚었다. 결국 둘은 갈라섰고 구성원들도 갈라졌다.

구성원들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처음 시작한 구성원들은 농부를 지원한다는 이유에서 시작했다. 나 역시 그 당시 100~200평 정도 농사를 짓고 있었고 자급할 정도였지만 한 농가라도 농사를 계속 지을 수 있게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참여했다. 하지만 나중에 참여한 구성원들 중에는 농산물이 한참 많이 나오는 철에만 참여하고 농산물이 적은 겨울에는 빠져나가는 경우가 생겼다. 이런 문제는 다른 곳에서도 발생하는 문제이고 일정 수준의 구성원이 유지되면 농부를 지원하는 데 큰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다행히 우리의 경우 농부를 지원하는 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이상의 문제에서 보듯이 공동체지원농업이 본래 취지에 맞게 유지되고 확장되기는 쉽지 않다. 공동체지원농업이 제대로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들이 갖춰져야 한다. 먼저 여러 농가가 참여해 농산물을 나눠서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계절적으로 꾸준히 일정한 양의 농산물을 보내고 한 농가당 적어도 한두 달의 농한기를 가져 휴식과 함께 관련 농업 기술을 배우고 익힐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다양한 구성원의 기호에 맞게 다듬은 농산물이나 가공품까지도 생산해서 구성원들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시스템적으로 지원해 줄 수 있는 공동체지원센터가 있어야 한다.

외국의 경우 공동체지원농업센터가 있어 농부가 생산한 농산물이 한 곳에 모이고 이곳에서 구성원들이 찾아와 농산물을 구매해 가는 것을 영상에서 본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공동체지원농업센터는 없지만 지금 웬만한 지역에는 한 개 이상의 로컬푸드센터나 매장이 있다. 이곳에 지역 농민들이 그날 수확한 농산물을 가져와 직접 포장하고 가격표를 붙인다. 농부에게는 사실 귀찮은 일이지만 싱싱한 농산물을 직접 소비자가 살 수 있고, 농부는 충분한 가격을 받는 이점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가공품도 팔고 있으며, 쌀과 같은 일부 농산물은 학교 급식으로도 대량 판매된다. 우리가 따로 공동체지원농업센터를 만들 수 없다면 기존의 로컬푸드센터나 매장을 이용해서 복합 공간으로 이용해 보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만으로는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농산물을 모두 충족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농부들은 매월 일정한 금액을 급여식으로 공동체지원농업센터로부터 받고 일정 간격으로 각자 할당된 생산물을 기본적으로 보낸다. 소비자들은 매월 일정 금액의 회비만큼 농산물을 선택해 가져가게 할 뿐 아니라 원하면 추가로 돈을 지불하고 더 구매할 수 있게 한다. 센터에서는 소비자를 확보하고 전체 회비만큼 생산할 농부를 섭외해 품목과 생산량을 할당하며, 생산자와 소비자 공동체를 위한 효소 만들기, 장 담그기, 김치 담그기 등의 각종 체험 행사와 축제 등을 기획한다. 이렇게 기존의 꾸러미 상자와 생협의 장점을 합쳐 놓은 형태로 공동체가 운영된다면 이상적인 공동체지원농업이 되지 않을까 싶다.

2020년 7월 2일 어느 휴게소에서 비 온 후의 노을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책읽기모임 회원들과 대안화폐를 소규모로 운영해 본 적이 있다. 단위는 한 땀 한 땀의 의미와 땀 흘리는 이었다. ‘은 생산자가 유통자이고 소비자인 자급자족의 지속가능한 사회를 꿈꾸었다. 또 인간의 모든 사회적 활동에 가치를 부여하고 노동이 없는 투자와 투기에 의한 부의 축척을 지양하며, 사람끼리는 물론 지구의 모든 생명들을 돌보며, 삶을 나누는 조화로운 삶을 지향했다. 화폐는 따로 발행하지 않고 거래가 있을 때마다 결과만 카페에 기록했다.

2014년부터 2년 동안은 수원 녹색평론읽기모임 회원들이 주축으로 수원에서 지역화폐 운동을 했다. 돈이 돈을 낳는 불평등과 지역의 돈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지역순환 경제를 목적으로 삼았다. 1년 동안 사전에 수원시평생학습관의 지원을 받아 강의도 마련하고 지역화폐 현장도 답사하는 등 학습 활동을 했다. 지역화폐에 대한 이해도가 사람마다 다르고 당시 지역화폐 자체를 모르고 있는 지역 활동가들도 있었기에 지역화폐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지역화폐 실천단원을 모집하고 생협, 카페, 음식점 등 가맹점을 모집하여 약 100명 정도가 참여했다. IT회사를 운영하는 운영위원이 있어 국내 최초로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지역화폐를 만들었다. 안드로이드 기반의 전자화폐로 단위는 수원이었다.

그 후 2016년에는 혜화(명륜)동에서 우리마을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벼룩시장과 함께 지역화폐를 운영했다. 지역의 책방, 식당, 약국 등 가맹점과 성균관대생, 주민 그리고 풀무질책놀이터협동조합원들이 참여했다. 목적은 아직 공동체 네트워크가 형성되지 않은 지역의 주민, 대학생, 상인이 함께 나누고 소통하는 교류의 장을 만들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지역화폐를 이용하는 벼룩시장을 운영하였다. 화폐는 인쇄된 종이에 도장을 찍어 만들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대안화폐(지역화폐) 활동을 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세상을 바꾸고 싶어서다. 세상을 바꾸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위에서 아래로의 방법이고, 하나는 아래에서 위로의 방법이다. 위에서 아래로는 정권을 잡아 제도를 바꾸는 방법이다. 하지만 시민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고 많은 저항과 부작용을 동반한다. 소수의 진보적 정당이 집권해야만 가능하지만 우리나라 현실에서 소수의 진보 정당이 정권을 잡는다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아래에서 위로의 방법은 시민들의 생활을 바꿈으로써 기존 체제를 바꾸는 것이다. 그런데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경제 즉, 돈이다. 돈의 흐름을 바꾸면 자연스럽게 체제가 바뀐다. 기존 법정 화폐 시스템의 문제점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새로운 화폐 시스템을 우리가 만들 수 있을까?

내가 경험한 세 번의 시도만 봐도 새로운 화폐 시스템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고 짐작할 것이다. 내가 경험한 것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지역화폐를 활성화하기 위해 수많은 시도가 있었다. 아직 버티고 있는 지역화폐도 있지만 한계가 명확하다. 그럼 문제는 무엇일까? 우리나라 지역화폐 운영에 있어서 일어나는 문제의 공통점은 돈은 돌고 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돌아야 할 돈이 어느 한 곳이나 몇 곳에 차곡차곡 쌓인다. 그렇게 쌓이는 이유는 쌓인 곳은 정작 돈을 쓸 데가 없어서다. 그래서 벼룩시장 같은 것으로 억지로라도 돈을 돌게 해야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가장 돈을 많은 쓰는 곳이 어딜까 생각해 보면 답은 어렵지 않다. 아이들을 키우는 집은 교육에 돈을 많이 쓸 것이고, 집 대출비, 각종 세금과 공과금, 핸드폰 등 전자제품 구입비와 사용비, 의료비 등으로 이웃과 교환할 수 없는 것에 대부분 지출한다. 정부나 공기업, 대기업 등 지역과 관계없는 곳에 주로 지출된다. 의식주 중 이웃과 교환 가능한 의식 비용의 비중은 높지 않다. 과거에는 집도 마을사람들과 함께 짓고 농사도 품앗이로 서로 도왔다. 자기가 농사짓지 못한 농산물은 서로 나누듯이 물물교환하고 옷이나 생활용품들도 사실상 교환이나 마찬가지로 거래되었다. 마을에서 자급할 수 없는 먹을거리나 생활용품은 장날 마을끼리 교환되었다. 이런 자급자족형 경제에서 돈은 사실 유통을 위한 매개체로 서로 간에 신용만 있다면 종이조가리든 쇠붙이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요즘 유튜브에서 귀농과 관련된 동영상을 보다보면 젊은 사람들이 귀농했다가 몇 억씩 빚더미에 앉았다는 동영상을 쉽게 마주칠 수 있다. 귀농창업자금은 한 푼도 만져 보지 못하고 농지와 농기계 구입비, 시설비로 나가고 몇 년 시행착오 끝에 겨우 생활비 좀 벌겠다 싶으면 원금을 갚을 상환 기환이 돌아와 빚쟁이가 된다는 것이다. 이들 말에 따르면 돈을 버는 것은 농협이나 농기계, 설비업자뿐이다.

농사를 오래 지어 노하우가 많이 쌓인 농부들도 억대의 돈을 벌기 위해서는 자본을 투입해야 한다. 한마디로 빚을 져야 한다. 농지를 더 구입하거나 빌려야 하고, 농기계도 구입해야 한다. 하지만 단일 작물을 넓은 농지에 키우거나 돈을 더 투자해 시설재배를 해도 자연재해나 병충해 등으로 흉작이 되거나 풍작이 되어도 농작물 가격이 폭락하기 일쑤다. 2~3년 빚으로 버티다가 한 해 돈을 벌어 갚기를 되풀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농부는 망해도 농업은 망하지 않는다. 대출 이자로 농기계 판매로, 설비 공사로, 비료와 농약을 팔아 돈 버는 농업 관계자들은 따로 있다. 정부의 지원금은 농부보다는 이들을 위해서 있다. 귀농인들이 많아질수록 고달파질수록 이들은 돈을 벌고, 농부들이 망해도 이들은 돈을 번다. 귀농 초년생들이 농사로 자리잡기까지는 각자의 노력에 따라 다르겠지만 몇 년이 걸린다. 이들에게 귀농창업자금으로 일확천금의 기회를 주는 것처럼 속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 외형을 부풀리기 좋아하는 정부 관계자나 농업 관계자들은 농업이 더 금융화되기를 원하겠지만.

나는 농사로 떼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우선 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돈은 우리를 편리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어야 한다. 돈 자체가 목적인 사람은 적어도 농사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 보고 과거처럼 살라고 할 수는 없다. 아미쉬 공동체처럼 살라고도 할 수 없다. 과거보다 훨씬 발달한 기술문명 덕분에 의지만 있다면 우리는 과거보다 자급자족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가 쉽고 적은 노력으로도 풍요로울 수 있다.

마을에서 식량과 에너지를 자급자족하기는 어렵지 않다. 우리집만 해도 밭작물은 자급자족의 2배 넘게 생산하고, 옥상에 태양광발전기 3Kw 2기가 설치되어 있어 사실상 전기는 남는다. 생존에 꼭 필요한 것만 자급할 수 있다면 마을에서 각자 남는 수확물을 나누고, 일손을 돕고, 재능을 나누어 나머지를 채우는 일은 어렵지 않다. 과거처럼 굳이 물물교환이나 품앗이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 얼마든지 마을에서 지역화폐를 발행해 해결할 수 있다. 화폐는 마을에서 돌고 도는 유통의 기능만 하면 된다. 경제 전반에 걸쳐서 70~80%만 자급자족하면 국내 경제는 물론 세계 경제에 어떤 어려움이 와도 생존에는 문제가 없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는 농사를 지어 떼돈을 벌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대농이 아니라 소농으로 서로가 서로를 보살피고 삶을 나누는 공동체의 삶을 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자급자족형 마을의 순환경제에서 화폐가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한 예를 들어 보겠다. 마을에는 생활에 필요한 모든 가게들이 있었다. 갑자기 대형 마트가 마을에 들어서서 모든 물건을 마을 가게보다 싸게 팔자 사람들은 모두 대형 마트를 이용했다. 대형 마트는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게 되자 모든 돈을 갖고 떠났다. 마을에 돈이 없어졌다. 사람들은 서로 빚을 지고 있었지만 값을 수가 없었다. 서로 망할 지경이라 더 이상 빚을 질 수 없었다. 어느 날 여행객이 마을 여관에 들어왔다. 여행객은 10만 원을 내고 숙박비를 지급했다. 여관 주인은 재빨리 10만 원을 쌀집에 갚았다. 쌀집은 고깃집에 10만 원을 갚았다. 고깃집은 옷집에 10만 원을 갚았다. 옷집은 저번에 친구들이 와서 묶었던 여관에 10만 원을 갚았다. 여행객은 잠시 쉬다가 짐을 풀려고 하는데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고 급한 일로 일정이 바뀐 여행객은 여관 주인에게 미안하지만 숙박하지 못하고 그냥 가야겠다며 환불을 요구했다. 짐도 풀지 않은 상태라 어쩔 수 없이 여관 주인은 환불을 해 주었다. 마을은 다시 돈이 없어졌다. 그렇지만 모두의 빚도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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