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주의(녹색주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내가 부러워 하는 옷은
도쿄에서 탤런트 이시카와 아사미가 선보인 17억6000억원짜리 백금 웨딩드레스도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식 때 입었다던
실크에다 수공예 레이스로 장식되고 135개의 다이아몬드가 달린 경매가 7억 달러짜리 옷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성철 스님이 입기도 하고 걸레 스님이 즐겨 입기도 한 낡은 승복이다.
헤어진 곳에 천을 덧대고 또 덧대어 원래 천이 남아 있기나 한지 알 수 없는 그런 옷이다.

사람들은 옷을 단지 몸을 가리거나 보온을 하기 위해서만 입는 것은 아니다.
더 큰 이유는 아름다워지기 위해서 때로는 자신의 지위와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서 입는다.
나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문제 삼고 싶어 하는 것은 우리가 정말 아름다운 것과
아름다워 보이는 것을 혼동하며 살고 있지는 않나 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쉽게 알아볼 수 없어서
외면적인 것으로 아름다움을 평가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비싸고 아름다운 옷을 입었다고 하더라도 단정하지 못하고 언행이 온전치 못하다면
아무도 그 사람을 아름답다고 보지 않을 것이다.
돈으로 무엇이든 평가하는 요즘 세상에서 아름다운 옷이라면 대개 비싼 옷을 의미하고
비싼 옷을 입는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특히 사기꾼들은 지나치게 비싼 옷과 차로 자신을 포장하는 것이겠지만.

내가 아는 한 사람 역시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다.
그 사람 앞에서 내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그 사람이 갖는 아름다움에 나는 따라갈 생각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람을 100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그 사람은 언제나 챙만 있는 모자와 검은 잠바 그리고 베이지색 골덴 바지를 입고 있다.
일년 열두달이 아니라 몇 년을 나는 오직 그 차림새의 그만을 봐 왔다.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이외수씨와 외모는 물론 이름까지 비슷해 이외수씨로 오해 받기도 하는 그는
그런 타인의 시선 때문에 챙만 있는 모자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김포에서 농사를 지으며 시를 사랑해서 옛 시집을 모으는 취미를 가진 그가 일년 열두달 입는 그 옷은
낡았지만 항상 깨끗하고 언행은 단정하다.
나는 내가 따라가지 못하는 그의 아름다움이 부럽다.

지금의 사회는 모든 것이 부족하기보다는 너무 넘쳐서 문제가 되는 것 같다.
한때 소비가 미덕이라고 외치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경제가 어렵기에 경제를 살리기 위해 소비를 늘려야 한다며 그런 말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꼭 필요한 이상의 소비를 만족하기 위해서는 에너지와 시간을 투입해야 할 뿐 아니라
자원을 채취, 가공하고 유통은 물론 소비된 후 폐기될 때까지
자연을 파괴하고 오염시킬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결과가 결국 우리에게로 되돌아 온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소비를 즐기는 이상한 문명인이다.

요즘 아이들은 왠만한 물건 심지어 핸드폰까지 잊어버려도 찾을 생각을 하지 않고 다시 사려고 한다.
그런 아이들에게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무엇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 같고 그런 아이들이 이끌어갈 세상은 아찔하기만 하다.
나는 아직은 헤어진 옷을 꿰매어 입는 것에는 부끄러움을 느낄 정도로 어리석고 모자란 사람이다.
약간 떨어진 양말이나 겨우 꿰매어 쓰려고 하는 정도다.
하지만 옛날 착용에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덧대에 꿰매 신던 양말이 그립다.
더 이상 덧대어 꿰매 신기 불편해지면 화장지로 사용하기도 했던 그 시절,
신문지는 물론 다 쓴 공책도 그냥 버리지 않았던 그 시절로
우리는 스스로 선택해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만큼, 불편함을 호소하지 않을 만큼 생산하고 아껴 써야
우리는 물론 다른 생명과 우리의 딸과 아들인 다음 세대의 생명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질이 넘쳐나다 보니까 사람들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물질적인 것으로 더 차별화 시키려 한다.
개성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요즘의 시대를 가장 쉽게 반영하는 것이 옷이 아닌가 한다.
각자의 개성을 잘 드러내려면 직접 옷을 만드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직접 옷 만들 정도까지의 기술이 없다면, 기술은 있어도 시간이 없다면
기존에 입던 낡은 옷에 약간의 디자인으로 낡은 부분이나 크기 등을 보강해 다시 입는 것은 어떨까.
그런 개성이 넘치는 옷들이, 환경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옷들이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한 수십수백억 원씩 하는 옷보다 나는 부럽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여러분은 어떤 옷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가?


이 글은 예전에 사형제도 찬반론 카페에서 논쟁을 벌였던 글의 일부를 옮긴 것입니다.
강호순의 연쇄살인 사건을 계기로 국민들의 감정이 치우친 틈을 타서
실제적 사형폐지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사형을 부활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심히 우려를 표합니다.
뜨거운 논쟁을 벌여 보는 것도 좋을 듯 싶습니다.

------------- 사형제도 찬성 입장 -------------
생명의 존엄성과 사형
사형반대론측에서는 '생명의 존엄성'을 들어서 사형을 반대한다.
그 이유는 국가가 살인의 주체가 될 수 없고, 만약 오판임이 밝혀 졌을 땐 되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다.

생명이 존엄하기 때문에 사형은 안된다..가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사형은 필요하다..고...
또, 조사단계나 심리과정에서 결함이 없고 충실하다면 오판이 나올 수 없고, 만약 시비거리가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유예기간을 두면 된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먼저 첫번째, 절대적 관점에서 봤을 때 사람의 생명은 모두 소중하다. 아니 사람 뿐만 아니라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다 소중하다. 우리에게는 그들을 죽이고 그들을 먹을 권리가 없다.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 풀 한포기, 바퀴벌레 한마리조차도 소중한 생명이다.

그러나 현실이 어디 그러한가? 모든 생명은 각자의 생명을 존속하기 위해서 자기보다 약한 자를 먹이 삼아 살고 있다. 또 특히 인간은 바퀴벌레, 모기, 파리 등을 해충이라 하여 살충까지 하고 있다.

현실이 이러한데, 절대적 관점에서의 생명관을 논할 수 있을까? 논하는 것은 문제 안되나, 그것을 사회 제도화 시키는 것은 곤란하다. 왜냐면 사회, 제도는 어디까지나 현실이기 때문이다. 절대적 관점에서는 선악, 우열이 존재하지 않지만, 이 현실 사회 속에선 우열과 선악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러한 속성은 유한한 자원을 가진 이 지구상에서 무한한 행복을 얻으려는 생명체들의 투쟁 때문에 생긴다. 이는 곧 경제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실과 그럼 아까 말한 절대적 관점에서의 생명관과는 무슨 관계일까? 후자는 다만 '감속제의 역할'밖에는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후자를 전자에 이식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탈속의 세계인 절조차도 속세의 돈과 인간때문에 유지되는 것이며, 소위 선진국들이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난민들을 도울 수 있는 것도, 알고 보면 과거 그들이 아프리카인들을 착취하고 제 맘대로 주물러서 그들의 경제 성장을 도모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미국이 기부문화가 발달한 것도, '사유재산제도'라는 인간의 이기심에 바탕한 자본주의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좀 더 철학적으로 얘기한다면, 완전한 선도, 완전한 악도 없다고 하겠다. 양면의 동전인 셈이다. 그래서 실상 생명을 존엄성을 논하고 생명을 지키는 일을 논하는 것에는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처벌, 죽임이 뒤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의 양면성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생명이 존엄하기 때문에, 사형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두번째... 첫번째 단계에서 나는 사형제도의 필요성을 말하였는데, 사형제도 자체는 동전의 뒷면이라 한다면, 그것을 정의롭고 합리적으로 운용하고 관리 감시하는 것은 동전의 앞면이며, 그런 동전이 '정의실현'이라는 목표를 향해 굴러 가는 것이다. 물론 거기까지 갈 수는 없을 것이다. 가다가 쓰러질 테니깐.. 그러나 노력하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인간의 존재이유가 있다고 해야 될것이다. 사형반대측에서는 동전이 쓰러지는 상황 때문에 사형을 반대한다고 하지만, 그 어떤 제도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대안으로 내놓은 '종신적 무기징역'에 대해서 그 점을 찾아 본다면, 일단 그들이 인간의 갱생가능성을 논하면서 종신적으로 감옥에 가두는 형벌을 대안으로 삼은 것은 모순이고, 또 후에 오판임이 드러났을 경우에 회복가능성에 대해서도...만약 오판가능성이 있는 사건이 10개가 있고 그 10개의 사건의 피고인은 종신적 무기징역을 살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그 가운데서 실지로 나중에 권리회복이 되는 경우는 그야말로 확률게임이라는 것이다. 즉 10개 모두 나중에는 권리회복이 된다고 할 수 없는 것이며, 되지 못한 경우는 오판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사형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억울하게 평생을 감옥에서 살아야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반대貶【?그렇게 오판의 발생빈도가 흔하진 않다고 말하신다면 큰 자가 당착이고, 그렇다면 사형제를 폐지할 것이 아니라, 좀 더 보완하여 결과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오판에 의해서 억울하게 죽은 경우가 0이 되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결과적인 관점'이라 한 것은, '과정'만을 가지고 따진다면 그 과정이 충실하다면, 오판에 의해 억울하게 죽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노력은 그 과정을 충실하게 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 결과까지도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형벌의 존재이유에 대해서 밑에 나그네님도 서술하셨다시피, 우선 기본은 '인과응보'이며 그 바탕위에서 고차원적인 '재사회화'를 논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다른 얘기지만 비슷한 예로 메슬러의 욕구단계이론을 들 수 있는데, 그 내용을 아시는 분이라면 내 말이 이해가 갈 것이다. 민생이 해결되어야 문화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 반박글 시작

첫 번째 논지는 완전한 선도 완전한 악도 없기 때문에 생명의 절대성을 사회제도화시킬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헌법이 인간은 모두 평등한 존엄성(생명권)을 가졌다는 것을 보장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다시 말하지만 누구의 생명권은 10, 누구는 9, 누구는 0 이렇게 상대적으로 제도화 시켜야 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그것 역시 사회제도화 시켜서는 안된다는 말인가? 그럼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현실은 생명의 절대성을 상실하게 하는 사형이 제도화 되지 않았나?
그리고 완전한 선도 완전한 악도 없는데 사형을 구형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 아닌가?
완전한 악도 없는데(절대적 악도 없는데) 어떻게 절대적 악으로 평가해서만 가능한 사형을 구형한다는 것인가?
그리고 비유가 잘못된 것 같다.
동전의 양면성이란 전쟁에서 한쪽에서 영웅이지만 적에게서는 원수라는 말이다.
관점에 따라 반대의 결론이 나올 때 가능한 비유다.
결론은 상대적으로 사람의 생명은 존엄하기 때문에 사형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인간의 생명을 상대적으로 계량화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논의 주제는 사형제도이므로 다른 생명의 절대성까지 논지하지는 않겠다.
참고로 나는 다른 생명(적어도 동물의 생명)도 존중하는 채식주의자이다.
그리고 살인과 사형이 다른 점은
살인은 이를테면 천재이고
(프랑스 혁명시 소매치기 사형장에서도 소매치기들이 설쳤다는 예를 들었다. 우연히 발견한 결과
잘못이 있었다. 워낙 오래 전에 읽었던 거라. ^^ 장소는 영국이었다.)
사형은 인재이다.
천재는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제도로 인한 피해인 인재는 막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아무리 법을 강화해도 의도적 살인이건 과실치사건 살인을 막을 수 없다.
문제는 사회구조 자체의 문제이므로 법을 강화할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적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살인이나 범죄가 사회 구조의 잘못이므로
오히려 피해자일 수 있는 범죄자에게 전적으로 모든 책임을 지게 하는
사형은 부당한 것이란 것을 다시 밝힌다.

두 번째 논지 역시 비유를 잘못했다.
그것은 마치 전쟁이 정의실현을 목표로 굴러간다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계속 전쟁을 해야 한다는 말 아닌가?
그리고 정의실현이라는 목표와 행위 주체자 설정이 잘못되었다.
전쟁을 예를 들면 행위 주체자는 사람이고 사람이 동전의 앞뒤와 같은 전쟁을
정의실현을 목표로 계속 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즉 제대로 비유한다면 동전에 해당하는 것은 사형제도이다.
동전의 앞뒤는 인권유린(범죄자)과 인권보장(피해대상자)의 양면성을 가진 것으로 봐야한다.
다시 말하지만 정의실현을 목표로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형제도를 계속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즉, 정의실현을 위한 도구를 잘못 선택했다는 것이다.

형벌론에서 보복론은 프랑스혁명 이전, 예방론은 19세기를 대표하며,
20세기 대표이론은 재사회화이론이다.
형벌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김정훈님의 '형벌의 기능'에 관한 논문을 추천한다.
짧지는 않지만 이해하기 쉽게 썼으므로 반드시 읽어보기 바란다.
나그네님의 218번 '특별예방이나 일반예방이론의 미신'글이 어떤 오류에 해당하는지 알 수 있으며
형벌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다.

http://members.tripod.lycos.co.kr/jhkim0118/p5.htm

그리고 정죄님이 좋아하는 분은 아닌 것 같지만 참고로
한겨레 21에 엑스리브리스를 연재했던 진중권님의 사형에 관한 두 글을 소개한다.

http://www.hani.co.kr/h21/data/L990531/1p7m5v1z.html
생명을 짓밟는 잔인한 보복

http://www.hani.co.kr/h21/data/L990628/1p7m6s09.html
엑스리브리스/신을 위한 원죄의식

 

---------------------------------------------- 나그네님의 218번 글 내용

특별예방이나 일반예방이론의 미신
요즘 아주 죽을 맛이다.
이렇게도 형법이론과 형벌이론을 구분할 줄 모르는 분이 많으며, 형벌이론 가운데 응보이론과 일반예방이론과 특별예방이론을 구별할 줄 모르는 분이 많더란 말인가?
이런 오해에 기인한 반박 때문에 필요없는 글을 자꾸 쓸 수밖에 없게 된다.

1. 일반예방에 관하여 살펴 보자. 우선 범죄를 형벌과 떼어 놓고 생각하며,(실제 일반예방이론은 그렇지 않지만, 이 까페의 일반예방론자들은 그렇다) 형벌의 목적은 범죄예방에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그네도 이제 나그네 고유의 반대논리가 아니라 형법학계에서 논박하는 내용을 그대로 옮길 수밖에 없다.

: 일반예방이론은 범죄인의 심리를 지나치게 단순화하였다는 비판을 받는다. 범죄단념(범죄예방)은 형벌위협에 대한 존중결과라고 단정할 수 없는 매우 복잡한 과정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적극적 일반예방이론에서 형벌이 사람들의 규범의식을 강화시켜 준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설명되지 않고 있다. 나아가서 일반예방적 형벌은 헌법의 가치선언과도 맞지 않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 헌법 제10조 인간존엄은 범죄인을 처벌하여 다른 사람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2. 특별예방이론에 관해서도 마찬가지 비판을 가할 수 있다.

: 특별예방이론은 법적으로 설명이 곤란하다고 한다. 즉 국가와 사회는 범죄인을 강제적으로 사회규범에 적응시킬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재사회화이론의 무분별한 횡행은 국가가 거대한 강제교육장으로 별모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비판받는다. 나아가서 재사회화목적은 구체적 기준이 없는 개념이기 때문에 국가형벌권이 자의적으로 확장될 위험이 있다. 혈벌의 보안목적에 대해 이 위험은 특히 크다. 그리고 '재사회화' 형벌이 겉으로는(이론적으로는) 인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범죄인의 신체와 정신을 이중으로 침해하는 매우 가혹한 형벌이라는 지적도 빼놓을 수 없다. 응보형벌을 받는 자는 단지 신체자유만을 제한받을 뿐이다.(이상 배종대, "형법총론")

3. 이상과 같이 일반인의 위하를 통하여 범죄예방을 달성하려고 하는 일반예방이론이나 범죄인의 악성을 순화하여 재사회화를 달성하려고 하는 특별예방이론은 그 자체로 문제가 많으며, 응보이론과 조화되지 않고서는 형벌을 합당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왜 우리 사형폐지론자는 이 미신에 빠져서 헤어나올 줄을 모르는가? 나그네가 권위자가 아니라서 그러는가?

4. 마치 일반예방이나 특별예방이면 만능인 줄 안다. 그러나 형법학계에서도 그런 구 이론은 폐기처분한 지 오래이다. 이 점 주지해 주기를 바란다. 범죄예방이나 재사회화는 형벌의 부차 고려사항일 뿐이다. 오히려 사람을 범죄구축의 도구로 본다는(이는 임상실험과 비슷한 개념이다) 비판을 받고 있을 뿐이다. 서양것이면 무조건 좋다고 환장들을 해 갖고, 도대체 무엇을 어찌 하겠다는 것인가? 형벌은 일반예방이나 특별예방이론이 없어도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예방이론이나 특별예방이론만으로는 절대로 성립할 수 없다.

5. 그러므로 일반예방이론이나 특별예방이론을 근거로 사형을 폐지하려는 주장에 반대한다.

6. 형벌이론은 어디까지나 범죄이론과 연결지어 고찰해야 하는 것이다. 범죄 내지 범죄이론을 쏙 빼 버리고 형벌 내지 형벌이론만을 탐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리라. 한 마디만 하자. 수주대토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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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칼럼] 일부 집행유예제
형벌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해선 두가지 이론이 있다.
하나는 응보형론이고 형벌이란 범죄에 대한 응보이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이 입장에선 죄와 형벌은 균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는 목적형론으로 형벌은 장래의 범죄를 예방하고 범죄로부터 사회를 방위하려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고 본다.

그런데 목적형론의 목적을 추구하는 방법으론 일반 예방론과 특별예방으로 나뉜다.

일반 예방이란 형사입법으로 국민에게 형벌이라는 심리적 위협을 줘서 범죄를 예방케 한다는 것이고 특별 예방은 범죄인에 대한 위협과 범죄인의 사회복귀 또는 사회격리를 통해 범죄인의 재범을 방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목적형주의라고도 한다.

이 목적형주의를 한층 진전시킨게 교육형주의다.

이 사상은 형벌이란 범인을 선량한 국민으로 개선할 수 있는 교육이어야 하고 범죄인의 재범을 방지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형벌을 집행하는게 유효할 경우 집행해야 하지만 집행을 유예하는 게 유익할 때는 집행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형벌의 개별화가 요청된다.

대법원은 지난10일 전국 형사재 판장회의에서 "일부 집행유예 제도"를 도입키로 하고 이를 위해 형법개정안을 마련할 방침이라 한다.

이 제도는 불구속 피고인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면서 최소 1개월 이상의 구금생활을 하게하고 나머지 형에 집행을 보류하는 것이다.

가령 "징역 2월-집행유예 4월"같은 선고가 내려질수 있다.

이 제도를 교육형주의 입장에서 보면 형사정책의 일보 후퇴라고 생각할수도 있다.

그러나 불구속 재판의 대폭 증가로 "범죄자가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피해자 보상을 지연시키는 경우가 늘 것으로 우려"되므로 단기형과 함께 이 제도를 도입키로 한것은 이해할만 하다.

불구속 재판이 형벌권의 약화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는 것으로 일반예방의 효과를 노린것으로 보인다.

영국에선 83년부터 실시해 재범방지에 상당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평가됐다 한다.

요는 재판부가 실제 형의 종류와 양형을 선고하는데 있어 형벌의 개별화와 제도의 취지를 얼마만큼 살리느냐는 운영의 묘에 달려 있지 않을까 싶다.



1997년 03월 11일 (화) 00:00
자료제공 : 한국경제신문
출처 : http://news.naver.com/news_read.php?oldid=1997031100000142042&s=1495&e=1728




먼저 제가 주장하는 것은 저의 생각을 바탕으로 제가 읽은 책과 주변의 채식주의자들의 생각을 정리한 것으로
모든 채식주의자의 의견은 아니라는 점을 밝힙니다.
먼저 채식주의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부분부터 말씀 드려야겠군요.
채식주의자란 단지 풀만 먹는 사람들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채식주의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합니다.
식물조차 죽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서 과실만 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벌꿀도 벌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먹지 않는 사람도 있고,
계란이나 우유까지 먹는 사람, 어류까지 먹는 사람, 닭고기까지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닭고기까지 먹는 사람을 세미베지테리언이라고 해서 채식주의자 범주에 넣고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저와 같이 계란이나 우유를 먹는 사람까지를 채식주의자라고 말합니다.
저와 같이 단지 생명을 죽이지 않고 부산물로 얻는 것은 먹는 사람도 있고
착취에 해당하는 것까지 먹지 않는 사람도 있고
인간과 가장 닮은 영혼을 소유한 포유류만 먹지 않는 사람도 있는 것이지요.
모두 기본적으로는 생명을 사랑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흔히 그러면 식물은 생명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당연히 식물도 고귀한 생명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명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생명이 귀한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죠.
내 생명이 귀한 줄 알기에 다른 사람의 생명도 귀한 것이고
또한 다른 동물, 다른 식물까지도 귀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사랑의 확장을 어디까지 하느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간도 생명이기에 다른 생명체를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주변의 환경과 기준의 척도에 따라 채식의 방법에도 약간씩 차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생물의 진화에서 보듯이 모든 생물은 유기적으로 연계된 존재들이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임의적으로 어느 단계에서부터 인류라고 규정한 것이지
처음부터 인간이라고 뚝 떨어져서 만들어져 나온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또한 채식주의자들은 에스키모인들처럼 채식을 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무조건 채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흔히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합니다.
예를 들어 내장이 터져 죽은 포유류에서 우리는 사람과 같은 끔찍함을 느끼지만
어류에서는 덜 느끼고 더 하등(?)인 동물에서는 그 느낌이 덜합니다.
사과나 배 그리고 무우나 배추가 부서지고 뜯어졌다고 끔찍함을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분명 선택의 기회가 주어져 있으며,
식물의 섭취가 동물에 비해 거의 모든 면에서 이롭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축우의 예를 들면 생산의 양이나 물의 소비, 에너지의 소비, 환경 오염에 있어서도
평균 20배 정도로 비효율적이고 비환경적입니다.
건강의 문제에 있어서 저는 주변에 육식을 지나치게 좋아해서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였다가
채식으로 건강을 되찾은 사람을 만나도 보고 이야기를 들어봤지만
지나치게 채식 위주로 해서 육식으로 건강을 되찾았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편식으로 이루어진 잘못된 채식 식단은 예외로 해야겠죠. ^^;
(채식에 대한 잘못된 상식은 존 로빈스가 쓴 '음식혁명'(시공사)를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장수하는 직업이 스님이라고 하더군요.
일반적(?)으로 스님은 채식을 합니다.
만일 채식만(채식주의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함을 무시하고) 해서는 건강에 해롭다면
스님이 가장 장수하는 직업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대만에 채식을 하는 인구가 30% 정도라는데 대만 사람들은 건강에 큰 문제를 갖고 사나요?
현재의 과학이 모든 것을 밝혀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어제의 진실이 오늘 거짓이 될 수 있는 것이 과학입니다.
몇몇 영양소에 대해서 또한 아스피린이나 기타 약재의 약효에 대해서도
제대로 파악되기까지(아직도 100% 파악은 안 된 것이죠) 무수한 경험적 사실이 밝혀져야겠죠.
일부 학자가 주장하는 말이 설령 사실이라도 우리가 경험을 통해 알려진 것들을 보면
채식의 효과(대부분의 한약도 식물이죠)는 입증된 것이 아닐까요.
주변에서 암을 치유하는 자연 요법으로 완전 채식을 해서 치료한 사람은 쉽게 찾아봐도
완전 육식으로 치료한 사람은 장담컨데 결코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육식은 워낙 먹을 것이 부족하던 때의 보조 음식으로 가치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수렵을 좋아하시면 직접 사냥을 하는 것보다
다른 방법으로 수렵본능을 만족 시키는 것은 생각하고 찾으려고 노력해 보셨나요?
낚시를 좋아하는 분들 중에는 미늘없이 낚시를 해서 잡은 물고기를 다시 모두 풀어주는 분들도 있습니다.
수렵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만일 맹수가 수렵인의 가족을 수렵인이 그들에게 하듯
그리고 수렵인 자신이 그렇게 당하는 것에 대해 역시 당연한다고 인정하는 것이겠죠.
제가 알기로는 일제 시대 이전 호랑이, 표범, 늑대 등 육식동물이 엄청 많았었고
이들 맹수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초식동물이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런 대형육식동물들이 절멸했다고 보여지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생태적 교란이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초식동물의 개체수가 과잉이라고도 보지 않습니다.
10~20년전보다 많이 늘어났지만 아직도 일반인들에게 중형 이상의 포유동물이 목격되는 빈도는
조선시대의 문헌 등에서 목격되는 양보다는 적은 것 같습니다.
보통 일반적으로 예를 드는 늑대와 토끼의 개체수의 상호 관계를 보더라도 천적이 사라지더라도
토끼의 개체수가 무한히 늘어나는 일은 없으며,
자연의 오염된 물을 어느 정도 자정하는 능력이 있듯이
종의 멸종이나 개체 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까지 생태적 균형을 조절하는 능력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또 설령 초식동물의 개체수가 지나치게 증가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위협이 느껴져 조절해야 할 때
우리가 육식동물을 멸종시키고 초식동물의 서식처를
파괴하고 빼앗음으로써 인해 일어나는 일이라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데
인간이 초식동물들의 생명을 죽여서 조절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이며,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지 않고 계속 문제만 발생 시키는 행위라고 봅니다.
그들의 서식처를 옛날처럼 늘여주고 확실히 보장해 주거나
완충지대 등을 만드는 등 우리가 그들에게 피해를 줘서 누렸던 이익의 일부를
그들에게 돌려주려고 조그만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야생동물만은 보호하자, 특히 멸종 위기종만이라도 보호하자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하루 130여종의 동식물이 멸종되는 현 시점에서
어떤 한 종의 멸종이 인류 전체의 생존에 심각한 위협을 준다면 모를까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라고 봅니다.
처음부터 야생동물이 아닌 동물이 있었을까요?
지금도 가축 중에는 야생화 되어 사는 종이 있으며,
야생동물임에도 길들여지고 사육되는 동물들이 있습니다.
만일 히틀러 같은 사람이 다시 나타나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좀더 우수한 종족이나 사람만 사람 대접을 하고
다른 종족이나 열등한 사람은 노예처럼 부려야 하며,
인도네시아나 아마존 밀림에 사는 멸종 위기의 원주민은 희귀하니 종의 보존 가치가 있고
연구 목적 등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사회의 지도층에게 요구하는 것은 노블리스 오블리쥬입니다.
인간이 이성적이고 존엄한 존재라면 지구상의 생명중 거의 절대적인 강자로서
상대적으로 약자인 자연의 생명체들을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이용하기보다
최소한 그들의 생명권만은 보살펴주려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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