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사회
- 한병철 지음/김태환 옮김/문학과 지성사 펴냄/2014.3.14
투명사회는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새로운 통제사회다.
5~6p
오늘날처럼 정보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사회에서는 신뢰에서 통제로의 시스템적 전환이 일어난다. 투명사회는 신뢰사회가 아니라 통제사회다.
모든 것이 즉각 공개된다면, 정치는 불가피하게 호흡이 짧아지고 즉흥적 성격을 띠게 된다. 정치는 잡담처럼 얄팍해진다. 전면적인 투명성은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에 일정한 시간의 굴레를 씌우는데, 그 속에서 천천히 장기적으로 계획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래지향적 비전은 점점 더 희소해진다. 천천히 무르익어야 하는 것들에 대한 배려는 점점 더 줄어든다.
12p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
나는 그것으로 살아간다.
- 페터 한트케
긍정사회
13p
오늘날 부정성의 사회는 소멸하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새로운 사회는 긍정성을 위해 부정성을 해체해가는 중이다. 그리하여 투명사회의 일차적 모습은 긍정사회로 나타난다.
14p
투명한 시간은 운명이 없는 시간, 사건이 없는 시간이다. 이미지는 모든 연출과 안무, 미장센이 제거될 때, 모든 해석학적 깊이가, 즉 의미가 사라질 때 포르노가 된다. 포르노는 이미지와 눈의 직접적인 접촉이다. 사물은 고유한 개별성을 상실하고 스스로를 오직 가격으로만 표현할 때 투명해진다. 돈은 모든 것을 비교 가능하게 만들면서, 사물의 통약 불가능성과 고유성을 완전히 철폐한다. 투명사회는 동일한 것의 지옥이다.
15p
투명성은 타자와 이질적인 것을 제거함으로써 시스템을 안정시키고 가속화한다. 이러한 시스템의 강제로 투명사회는 곧 획일적 사회가 된다. 바로 이 점에 투명사회의 전체주의적 특성이 있다. “획일화를 표현하는 새 단어: 투명성.”
18p
투명성의 강제에는 바로 이러한 섬세함, 즉 결코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다름에 대한 존중이 결여되어 있다. 오늘날 사회를 사로잡고 있는 투명성의 파토스에 맞서기 위해서는 거리의 파토스(pathos der Distanz)를 위한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거리와 부끄러움은 자본, 정보, 커뮤니케이션의 가속화된 순환 과정 속으로 통합되지 않는다. 따라서 물러나 있을 수 있는 모든 내밀한 공간은 투명성의 이름으로 제거되는 것이다. 그런 공간들은 환하게 밝혀지고 철저히 이용된다. 이로써 세계는 후안무치해지고 적나라해진다.
20p
투명사회는 정보의 공백도 시각의 공백도 용인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유도 영감도 어떤 빈자리를 필요로 한다. 게다가 행복(Glück)이란 단어는 빈틈에서 유래한 것이다. 행복은 중고지 독일어에서는 gelücke였다. 빈틈의 부정성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사회는 행복이 없는 사회이다. 시각의 빈틈이 없는 사랑은 포르노이다. 그리고 지식의 빈틈이 없다면 사유는 계산으로 전락하고 만다.
24p
“18세기만 하더라도 아직 대단한 자신감이 있었고 비밀스러움이라는 귀족적 개념을 과감하게 시험해볼 수 있었다. 그런 용기가 사라져버린 사회에서는 ‘기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위계질서도, 어떤 비밀 외교도, 더 나아가 어떤 정치도 더 이상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밀’은 모든 위대한 정치의 본질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무대 위에서 벌어진다(파파게노들의 관람석 앞에서).”
25p
해적당은 반(反)정당이며 색깔이 없는 최초의 정당이다. 투명성은 색깔이 없다. 해적당에서 색깔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몰이데올로기적인 의견인 한에서만 허용된다. 의견은 아무런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의견은 이데올로기처럼 전체를 장악하고 전체를 꿰뚫는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의견에는 뒤집어 엎어버리는 부정성이 없다. 그리하여 오늘의 의견사회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건드리지 않은 채 놓아둔다. ‘액체 민주주의(Liquid Democracy)’는 상황에 따라 색깔을 바꾸는 유연성을 발휘한다. 해적당은 색깔 없는 의견 정당이다. 정치는 기존 사회의 사회 경제적 관계를 건드리지 않은 채 그 속에 틀어박혀서 그저 다양한 사회적 욕구를 관리하는 역할로 위축된다. 해적당은 반정당으로서 정치적 의지를 천명하고 새로운 사회적 좌료를 정립할 능력이 없다.
26p
투명성은 시스템의 외부를 보지 못하고, 그저 이미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고 최적화할 뿐이다. 따라서 투명사회 포스트정치와 일치한다. 완벽하게 투명한 것은 오직 탈정치화된 공간뿐이다. 지향점(Referenz) 없는 정치는 국민투표(Referendum)로 전락한다.
투명성과 진리는 같은 것이 아니다. 진리는 다른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립하고 관철한다. 그 점에서 진리는 부정성이다. 정보의 증가와 축적만으로 진리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정보에는 방향, 즉 의미가 없다. 진리의 부정성이 결여됨으로 인해 긍정적인 것이 마구 증식하고 다량화된다. 과다 정보와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바로 진리의 결핍, 존재의 결핍을 드러낼 뿐이다.
전시사회
29p
폐쇄의 부정성은 제의가치의 본질적 구성 성분이다. 사물들이 모두 상품화되어 전시되지 않으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는 긍정사회에 사물들의 제의가치는 전시가치에 밀려 사라지고 만다. 전시가치의 관점에서 볼 때 존재하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자기 안에 조용히 있는 것, 홀로 머물러 있는 것은 더 이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사물들은 오직 보이는 한에서만 가치를 획득한다.
31p
롤랑 바르트에게서 사진은 시간의 부정성을 본질적 구성 요소로 하는 생의 형식과 결부된다. 하지만 이 경우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진의 기술적 조건, 즉 아날로그적 성격 때문이다. 디지털 사진은 전혀 다른 생의 형식, 점점 더 부정성에서 벗어나는 생의 형식에 부합한다. 그것은 탄생도 죽음도 없는, 운명도 사건도 없는 투명한 사진이다. 운명은 투명하지 않다. 투명한 사진은 의미론적, 시간적 응축을 알지 못한다. 그러한 사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32~33p
전시되는 사회에서는 모든 주체가 스스로를 광고의 대상으로 삼는다. 모든 것이 전시가치로 측정된다. 전시되는 사회는 포르노적 사회이다. 모든 것이 겉으로 나오고, 벗겨지고, 노출된다. 과도한 전시의 결과로 모든 것이 “어떤 비밀도 없이 즉각적인 소비에 내맡겨진” 상품으로 전락한다. 자본주의 경제는 모든 것을 전시의 강제 아래 복속시킨다. 오직 전시적 연출만이 가치를 생성한다. 사물의 고유한 형태는 폐기된다.
33~34p
전시(Ausstellung)는 곧 착취(Ausbeutung)다. 전시하라는 명령은 거주라는 것 자체를 소멸시킨다. 세계 자체가 전시 공간이 될 때 거주는 불가능해진다. 거주가 소멸한 자리는 주의자본(注意資本)을 증식하기 위한 광고로 대체된다. 본래 거주란 “만족한 상태, 평온해짐, 평온 속에 머무르기”를 뜻하는 말이었다. 항상적인 전시와 성과의 압박은 거주의 평화를 위협한다. 이와 함께 하이데거가 말하는 사물도 완전히 사라진다. 하이데거의 사물은 전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온전히 제의가치로만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37p
투명성은 결국 “시선과 시선의 대상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전면적 난교”, 다시 말해 “매춘”이다. 시선은 사물들에서 지속적으로 발산되는 광선에 자신을 내맡긴다. 거리의 부재로 인해 지각은 촉각적 성격을 띠게 된다. 여기서 촉각성이란 닿지 않는 접촉, 극도로 근접한 “눈과 이미지의 마주침”을 의미한다. 거리가 사라짐에 따라 어떤 심미적 관찰도, 어떤 머무름도 불가능해진다. 촉각적 지각은 심미적 거리를 둔 시선의 종언, 더 나아가 시선 자체의 종언을 가져온다.
명백사회
38p
투명사회는 쾌락에 대해 적대적인 사회이다. 인간적 쾌락의 경제 내부에서 쾌락과 투명성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리비도의 경제는 투명성을 알지 못한다. 비밀과 베일과 은폐와 같은 부정적 요소야말로 욕망을 자극하고 쾌락을 강화한다. 가상을 가지고 노는 것이다. 투명성의 강제는 쾌락의 놀이 공간을 파괴한다. 명백성은 유혹 대신 절차만을 허용한다. 하지만 유혹자는 돌아가는 길, 갈라진 길, 미로처럼 꼬인 길을 걸어간다. 그는 다의적인 기호를 동원한다. “유혹은 흔히 다의적 약호에 의존한다. 이 때문에 서양 문화에서 원형적인 유혹자들은 특정한 의미의 비도적성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40~41p
짐멜은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경우에도 매력이 유지되려면 그의 일부분은 불명확하고 비가시적이어야 한다.” 환상은 쾌락의 경제학에서 본질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전혀 가려지지 않은 대상은 환상을 차단한다. 물러난 대상, 손에서 벗어나버린 대상만이 환상에 불을 붙인다. 실시간의 향락이 아니라 상상 속의 전희와 후회가, 시간적인 유예가 쾌락을 깊게 한다. 상상 속의 서사적 우회로를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직접적인 향락은 포르노적이다. 과도하게 선명하고 뚜렷한 미디어 속의 극사실적 이미지들은 환상을 마비시키고 질식시킨다. 칸트에 따르면 상상력의 바탕은 놀이에 있다. 상상력은 확고하게 한정되지도 않고 분명한 윤곽선도 없는 놀이 공간을 전제한다. 상상력은 선명하지 않은 것, 불명확한 것을 필요로 한다. 상상력은 스스로에 대해 투명하지 않다. 자신에 대한 투명성은 이성의 특징이다. 그래서 이성은 놀지 않는 것이다. 이성은 명확한 개념을 가지고 일한다.
42p
신성한 것은 투명하지 않다. 오히려 신성한 것은 비밀스러운 흐릿함을 특징으로 한다. 도래할 평화의 왕국은 투명사회가 아닐 것이다. 투명성은 평화의 상태가 아니다.
43~44p
리비도 경제는 권력경제적 논리를 따른다. 왜 인간에게는 권력을 행사하려는 성향이 이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푸코는 쾌락경제에 관한 언급으로 답하고 있다.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자유로울수록 다른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서 오는 쾌락은 그만큼 더 크다는 것이다. 이때 게임이 더 불확실해질수록, 그리고 타인의 행동을 조종하는 게임의 방식이 더 다채로워질수록 쾌락도 그만큼 더 증대된다.
45~46p
계략은 정언명령에 의해 이끌린 행동보다 더 효과적이고 덜 폭력적이다. 그래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계략은 폭력보다 더 낫다.” 계략은 주변을 둘러보고 그때그때 상황 속의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점에서 더 유연하고 더 많은 융통성을 발휘한다. 계략은 정언명령보다 더 잘 본다. 반면 정언명령은 경직되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해 투명하다. 폭력은 계략보다 진리에 더 가깝다. 그리하여 폭력은 더 큰 ‘명백성’을 낳는다. 니체는 여기서 완벽한 조명과 통제의 사회에서는 가능하지 않을 보다 자유로운 삶의 형식을 옹호한다. 그것은 대칭성과 동등성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계약 사상이나 교환 경제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도 자유롭다.
47p
감추어져 있다는 부정적 특성은 해석학을 에로티즘으로 만든다. 발견과 해독은 벗기는 쾌감을 일으킨다. 반면 정보는 적나라하다. 벌거벗은 말은 매력을 상실하고 평범해진다. 비밀의 해석학은 투명성을 위해 어떻게 해서든 폐기해야만 하는 악마의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술, 다시 말해 설사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할지라도 뭔가 깊이를 창출하는 문화적 기술이다.
포르노사회
49p
폭로는 가려진 것을 없애버린다. 따라서 벌거벗은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 것으로도 가리지 않은 채 벌거벗은 상태에서 본질적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인간의 벗은 몸 속에서 모든 미를 뛰어넘은 어떤 존재, 즉 숭고한 것이 완성되었다. 그것은 모든 형상을 뛰어넘는 어떤 작품, 즉 창조주의 작품이다.” 오직 어떤 형식이나 형상만이 아름다울 수 있다. 반면 숭고한 것은 형식이나 형상이 없는 벌거벗음이며, 여기에는 미를 구성하는 비밀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숭고함은 아름다움을 넘어선다. 하지만 피조물로서의 벌거벗음은 전혀 포르노적이지 않다. 그것은 참으로 숭고하며 창조주의 업적을 환기한다. 칸트 역시 모든 재현, 모든 상상을 뛰어넘는 대상에 대해 숭고하다고 말한다. 숭고함은 상상력을 초월한다.
52p
하지만 도구는 목적에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결코 기품을 지닐 수 없다. 도구는 목적을 향해 거침없이 돌진하고 달려든다. 반면 기품에는 뭔가 굽은 것, 우회적인 것이 내재한다. 기품은 몸짓과 형식의 자유로운 유희, 행동을 슬쩍 돌아 나가며 목적의 경계에서 이탈하는 유희를 전제한다. 따라서 기품은 목적 지향적 작전과 외설적인 벌거벗음 사이에 위치한다. 아감벤은 이처럼 기품 있는 중간 지대를 간과한다. 스스로를 전시하는 행위도 기품을 없애버린다.
55~56p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몸의 전시는 긍정적인 만큼 포르노적이다. 여기에는 에로틱한 광채가 없다. 포르노적인 몸은 매끄럽다. 그것은 무엇에 의해서도 중단되지 않는다. 중단은 양가성과 중의성을 낳는다. 바로 이 같은 의미의 불명확성에 에로티즘이 있다. 더 나아가 에로틱한 것은 비밀과 은둔의 부정성을 전제한다. 투명성의 에로티즘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면적인 전시와 노출에 밀려 비밀이 사라진 바로 그때부터 포르노는 시작된다. 침투하고 투과하는 긍정성이 포르노의 특징이다.
57~58p
바르트는 사진의 두 가지 요소를 구분한다. 첫 번째 요소를 그는 “스투디움(studium)”이라고 부른다. 탐구해야 할 광대한 정보들의 영역과 “시름없는 소망, 방향 없는 관심, 일관성 없는 기호-좋다/싫다-의 영역이 여기에 해당된다. 스투디움은 ‘사랑하다’가 아니라 ‘좋아하다’의 범주에 들어간다. ‘좋아요/싫어요’가 스투디움의 판단 형식이다. 스투디움에서 격렬함이나 열정 같은 것은 전혀 없다. 두 번째 요소인 ”푼크툼(punctum)은 “스투디움”을 깨뜨린다. 그것은 호감이 아니라 어떤 상처, 격한 감동, 당혹감을 낳는다. 단조로운 사진은 푼크툼이 없는 사진이다. 그것은 스투디움의 대상일 뿐이다. “보도 사진들은 대체로 단조로운 사진에 속한다(단조로운 사진이 반드시 평화로운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이미지들 속에는 푼크툼이 없다. 충격은 있을지언정-평범한 것도 충격을 일으킬 수 있다-당혹감을 일으키지는 못한다. ‘울부짖는’ 사진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진도 상처를 입히지는 못한다. 이와 같은 보도 사진들은 (한눈에) 분류되고 정리된다. 그 이상은 아니다.” 푼크툼은 연속적인 정보들의 행렬을 중단시킨다. 그것은 균열, 단층으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푼크툼은 극도의 강렬함과 응축의 장소이며, 그 속에는 뭔가 정의할 수 없는 것이 내재한다. 푼크툼에는 스투디움에 특정적인 투명성과 명백성이 전혀 없다.
60p
푼크툼은 오직 머물러 있는 사색적 관찰 앞에서만 열린다. 반면 연속적으로 흘러가는 영화의 이미지들은 바르트에 의하면 관찰자에게 “끊임없는 탐식”을 강요한다. 푼크툼은 “숙고적 태도”라고는 알지 못하는 소비적이고 탐식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있다. 많은 경우 푼크툼은 즉시 발현하기보다는 뒤에 가서야 머물러 회상하는 의식에 나타난다. “그러니까 푼크툼이 대단히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나중에 가서야, 내가 사진을 더 이상 눈앞에 두고 있지 않은 채 다시금 사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진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 그리하여 나는 깨달았다. 푼크툼이 아무리 직접적이고 날카롭다 하더라도 어떤 잠재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임을(결코 엄밀한 조사를 받아들이지는 못하지만).” “음악”은 “눈을 감을 때” 비로소 발생한다.
60~61p
음악은 오직 이미지에 대한 사색적 거리 속에서만 울려 나온다. 반면 눈과 이미지가 직접적인 접촉으로 연결되는 순간 음악은 그친다. 투명성에는 음악이 없다. 또한 사진은 “고요”해야 한다고 바르트는 말한다. “고요를 향한 노력” 속에서 사진은 자신의 푼크툼을 드러낸다. 푼크툼은 사색적 머무름을 가능하게 만드는 고요의 장소이다. 사람들은 포르노 사진 앞에서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런 사진들은 전시된 것이기에 현란하고 시끄럽다. 여기서는 시간적인 폭도 찾아볼 수 없다. 어떤 기억도 허용되지 않는다. 포르노 사진은 직접적인 흥분과 욕망 충족에 봉사할 따름이다.
62p
포르노 이미지들은 포스트해석학적이다. 포르노적 이미지들은 스투디움을 위해 필요한 거리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읽기가 아니라 전염과 긴장 해소가 이들이 작용하는 방식이다. 여기에는 어떤 푼크툼도 없다. 포르노적 이미지는 속이 비워지면서 스펙터클의 대상이 되고 만다. 포르노사회는 스펙터클의 사회이다.
가속사회
65~66p
프로세서는 서사성의 결핍으로 인해 행렬(Prozession)과 구별된다. 행렬은 서사적 사건이다. 행렬은 프로세서와 달리 강력한 방향성을 지닌다. 따라서 행렬은 전혀 외설적이지 않다. 프로세서와 행렬은 모두 “전진”을 의미하는 라틴어 동사 procedere에서 나왔다. 행렬은 하나의 이야기 속에 편입되어 있다. 이로 인해 행렬에서는 서사적 긴장이 생겨난다. 행렬은 하나의 이야기에서 특별한 대목을 연극적으로 재현한다. 미장센은 행렬의 본질적 요소이다. 행렬은 서사성을 지니는 까닭에 고유한 시간의 흐름을 따른다. 따라서 행렬을 더 빠르게 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야기는 더하기가 아니다. 반면 프로세서의 전진(procedere)에서는 어떤 서사성도 찾아볼 수 없다. 프로세서의 작동에는 어떤 이미지도, 어떤 장면도 없다. 행렬과 반대로 프로세서는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프로세서는 오직 셈할 뿐이다. 숫자는 적나라하다.
69p
오늘의 사회를 지배하는 긍정성의 과잉은 이 사회에서 서사성이 사라졌음을 방증한다. 기억 또한 그러한 변화의 영향을 받는다. 기억은 서사적이라는 점에서 그저 덧붙이고 쌓기만 하는 저장과 구별된다. 기억의 자취는 그 역사성 때문에 늘 재정리되고 수정되는 과정 속에 놓인다. 이와 반대로 저장된 데이터는 늘 동일한 상태로 남아 있다. 오늘날 기억은 긍정화되어 쓰레기와 데이터의 더미로, “고물가게”로, 또는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다량의 온갖 이미지와 닳아빠진 상징들이 완전히 뒤죽박죽으로 꽉 차 있는 창고”로 전락한다. 고물가게의 사물들은 차곡차곡 정돈되지 않고, 그저 나란히 널려 있을 뿐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역사가 없다. 고물가게는 기억도 망각도 하지 못한다.
70p
사건과 자극의 빠른 교체는 아름다움의 시간과는 거리가 멀다. 미는 머뭇거리며 더디게 찾아온다. 나중에 가서야 사물들은 아름다움의 향기로운 정수를 드러낸다. 아름다움은 인광을 발하는 시간의 층과 침전물들로 구성된다. 투명성은 인광을 발하지 못한다.
70~71p
원자는 향기가 없다. 원자는 비유의 매력과 서사의 중력을 통해 비로소 향기를 가진 분자로 통합된다. 서사적 구조물은 향기를 발산한다. 가속화 자체가 문제의 본질이 아닌 까닭에 문제의 해결책도 느리게 살기에서는 찾을 수 없다. 느리게 살기만으로는 어떤 박자도, 어떤 리듬도, 어떤 향기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느리게 살기는 공허로의 추락을 막을 수 없다.
친밀사회
72~73p
18세기 세계는 세계 극장(theatrum munch)이었다. 이 세계에서 공적 공간은 일종의 무대 같은 것이다. 연극적 거리가 육체와 육체, 영혼과 영혼의 직접적 접촉을 막아준다. 연극적인 것은 촉각적인 것과 대립한다. 사람들은 예식적인 형식과 기호를 통해 소통하고, 이는 영혼의 짐을 덜어준다. 근대는 점차 연극적 거리를 친밀성으로 대체해간다. 리처드 세넷은 이를 치명적인 변화로 본다. 인간은 “외부로 드러나는 자신의 이미지를 뜻대로 다루며 여기에 감정을 투입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형식화, 관습화, 제의화는 표현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극장은 표현의 장소다. 다만 극장에서는 객관적 감정이 표현될 뿐, 내면의 심리가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전시가 아니라 재현이다. 오늘의 세계는 행위와 감정이 재현되고 읽히는 극장이 아니라 내밀함이 전시되고 판매되고 소비되는 시장이다. 극장이 재현의 장소라면 시장은 전시의 장소다. 그리하여 오늘날 연극적 재현은 포르노적 전시에 밀려난다.
74p
소셜미디어와 개인화된 검색엔진은 네트워크 내에 외부가 제거된 절대적인 인접 공간을 수립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을 닮은 사람들을 만난다. 여기에는 변화를 가능하게 할 어떤 부정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디지털 이웃사촌의 공간은 참여자에게 마음에 드는 세계의 단면만을 제공하며, 그럼으로써 공론장, 공적 영역, 비판적 의식을 해체하고 세계를 사적인 장소로 만들어버린다. 인터넷은 친밀성의 영역, 혹은 아늑한 지대로 변모한다. 모든 먼 것이 제거된 가까움 역시 투명성의 한 가지 표현 형식이다.
75~76p
개인(person; 라틴어 persona)의 본래 의미는 가면이다. 가면은 가면을 통과하여 울려오는(per-sonare) 목소리에 성격, 즉 형식과 형상을 부여한다. 드러내고 노출하는 투명사회는 모든 형태의 가면, 모든 형태의 가상에 대해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점진적인 사회의 탈제의화와 탈서사화 과정 역시 모든 가상의 형식을 제거하여 사회를 벌거숭이로 만들어버린다. 놀이와 제의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객관적 규칙이지 주관적 심리 상태가 아니다. 다른 이들과 게임을 하는 사람은 객관적인 게임 규칙에 복종한다. 게임의 사교성은 게임 참여자들이 서로에게 자기를 드러내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오히려 서로에 대해 거리를 유지할 때 더 잘 어울리게 된다. 반면 친밀성은 사람들 사이의 교류를 불가능하게 한다.
친밀사회는 제의화된 동작과 격식을 갖춘 행동을 불신한다. 그런 것들은 겉치레이고 진정성이 없다는 것이다. 제의는 탈개인화, 탈인격화, 탈심리화를 촉진하는 외면화된 표현 형식들로 이루어진다. 제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표현적”이지만, 그렇다고 자기를 전시하거나 노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친밀사회는 심리화되고 탈제의화된 사회다. 그것은 고백의 사회, 노출의 사회, 거리를 모르는 포르노의 사회다.
77p
친밀사회는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에게서 벗어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제의적, 의식적 상징들을 제거한다. 경험은 타자와의 만남이다. 반면 체험 속에서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만을 볼 뿐이다.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계를 한정하지 못한다. 그에게 현존재의 경계는 흐릿하다. 그런 까닭에 안정적인 자아의 이미지도 생겨나지 못한다.
정보사회
79~80p
플라톤의 동굴 우화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해석하듯이 상이한 인식의 형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이한 삶의 형식을 보여준다. 하나는 서사적 삶의 형식이고 다른 하나는 인식적 삶의 형식이다. 플라톤의 동굴은 극장이다. 동굴 우화에서는 서사적 세계로서의 극장이 인식의 세계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81~82p
투명사회 역시 시인이 없는 사회, 유혹도 변신도 없는 사회이다. 시인이란 누구인가? 시인은 연극적 환상, 가상의 형태, 제의적, 의식적 기호를 생산하는 자, 적나라한 사실에 예술작품(인공물), 반(反)사실을 맞세우는 자인 것이다.
82p
플라톤적 진리의 세계와는 반대로 오늘의 투명사회에는 형이상학적 긴장을 품고 있는 저 신성한 빛이 존재하지 않는다. 투명성에는 초월성이 없다. 투명사회는 빛이 없이 속이 비친다. 투명성은 어둠을 밝혀주는 빛의 원천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투명성의 매체는 빛이 아니라 빛이 없는 방사선이다. 방사선은 밝히는 대신 모든 것을 꿰뚫고 들어가 속이 훤히 비치게 만든다. 방사선은 빛과 반대로 투과하고 관통한다. 또한 형이상학적 빛이 위계질서와 구별을 생성하고 이로써 질서와 방향성을 창출한다면, 방사선은 모든 것을 동질화하고 평준화한다.
85~86p
하이데거에게 그림은 존재자를 장악하고 소유하는 데 필요한 매체이다. 이러한 그림의 이론은 오늘날 범람하는 미디어의 이미지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런 이미지들은 더 이상 ‘존재자’를 재현하지 않는 시뮬라크르이기 때문이다. 이미지들의 바탕에서 존재자를 “자기 앞에 세우고 그렇게 세워진 것으로서 늘 자기 앞에 둔다.”는 의도는 찾아볼 수 없다. 이미지들은 지시대상이 없는 시뮬라크로서 거의 독자적인 삶을 살아간다. 이미지들은 권력도 지배도 넘어서 마구 증식해간다. 이미지들은 “존재자”보다 더 존재적이고 더 활발하다. 멀티미디어적인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더미는 “세움(Ge-stell)이라기보다 잡탕(Ge-menge)에 가깝다.
투명사회에는 진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가상도 없다. 진리도, 가상도 투명하지 않다. 완전히 투명한 것은 공허뿐이다. 이 공허를 제거하기 위해 대량의 정보가 유통된다. 하지만 이렇게 정보와 이미지의 거대한 더미로 채운다 해도 공허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정보와 커뮤니케이션만으로 세계를 밝힐 수는 없다. 투명성도 눈을 밝게 해주지는 못한다. 정보의 무더기가 진리를 낳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정보가 방출될수록 세계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다. 과다 정보와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어둠 속에 빛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폭로사회
87p
장 스타로뱅스키는 루소에 관한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상의 거짓됨이라는 테마는 1748년에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극장에서, 교회에서, 소설에서, 신문에서 모두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허위와 인습과 위선과 가면을 고발했다. 논쟁과 풍자의 어휘 가운데 탄로, 폭로만큼 자주 등장하는 개념도 없었다.” 장-자크 루소의 ‘고백록’ 서두에서 이미 한 인간을 “완전한 본성의 진실”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여주고자 한다고 밝힌다. 전혀 “유례가 없는” 자신의 “기획”은 “마음”의 가차 없는 공개를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마음은 개방되어야 한다. “마음의 개방”은 “모든 감정, 모든 상념을 공유할 수 있게 해주고, 그래서 모두가 자신이 어떠해야 하는지 느끼면서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모두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루소는 사람들을 향해 “똑같은 솔직함으로” 마음을 “공개”하라고 촉구한다. 이것이 바로 루소가 추구한 마음의 독재다.
90~91p
루소는 연극이 투명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위장과 가상과 유혹의 장소라고 비난한다. 표현은 포즈가 아니라, 투명한 마음의 반영이어야 한다.
모든 어둠을 추방하려는 영웅적인 투명성의 기획은 폭력으로 귀결된다. 이미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도 발효된 바 있는 극장과 미메시스 금지령으로 인해 루소의 투명사회는 전체주의적 성격을 띠게 된다. 따라서 루소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도시를 선호한다. “모든 개인이 언제나 공공의 감시 하에 있고, 모두가 자연스럽게 타인의 풍기단속관이 되며, 경찰도 어렵지 않게 모두를 감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루소의 투명사회는 전면적인 통제와 감시의 사회임이 드러난다. 투명성에 대한 요구는 더욱 첨예화되어 하나의 정언명령이 된다. “다른 모든 것을 대체할 수 있는 윤리학의 유일한 계율은 다음과 같습니다. 온 세계가 보거나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은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행하지도 말라. 나 자신으로 말하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밖에서도 다 보이는 집을 짓고 싶어 했던 한 로마인이야말로 가장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92p
디지털 네트워크에는 전통적으로 신학적, 형이상학적 진리의 매체였던 마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디지털 투명성은 심전도 검사를 알지 못하고, 다만 포르노적일 뿐이다. 디지털 투명성은 또한 세계를 경제적 파놉티콘으로 만든다. 그것의 목표는 마음을 도덕적으로 교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익을 최대화하는 것, 주목도를 최고로 높이는 것이다. 완전한 조명은 최대한의 착취를 약속한다.
통제사회
95p
“따라서 잘 알려진 장치들, 즉 보면서 보이지 않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장치들과 아울러 감독관의 중심적 입지가 파놉티콘의 본질을 이룬다.” 정교한 기술의 도움으로 지속적인 감시의 환상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투명성은 일방통행적 성격을 지닌다. 이러한 투명성은 원근법적이며, 그것이 권력 구조와 지배 구조의 기반이 된다. 반면 비원근법적 구도에서는 중심적인 눈, 중심적인 주체나 주권이 형성되지 않는다. 벤담의 파놉티콘에 갇힌 수감자들이 감독관의 지속적인 현존을 의식한다면, 디지털 파놉티콘의 주민들은 자유롭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95~96p
디지털 파놉티콘의 특수성은 무엇보다도 그 속의 주민들 스스로가 자기를 전시하고 노출함으로써 파놉티콘의 건설과 유지에 능동적으로 기여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파놉티콘적 시장에 전시한다. 포르노적 과시와 파놉티콘적 통제가 서로를 넘나든다. 노출증과 관음증이 디지털 파놉티콘인 인터넷을 살찌운다. 주체가 외적인 강제에 외해서가 아니라 자가발전적인 욕구에 의해서 스스로를 노출할 때, 그러니까 자신의 사적이고 은밀한 영역을 잃게 될까 하는 두려움이 그것을 버젓이 드러내놓고자 하는 욕망에 밀려날 때, 통제사회는 완성된다.
96~97p
아무도 말리지 못할 감시기술의 진보에 직면하여 미래학자 데이비드 브린은 전진하는 도주의 길을 택한다. 즉 모두에 의한 모두의 감시, 감시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브린이 생각하는 “투명한 사회”의 유토피아는 감시의 경계선을 제거하는 데서 성립한다. 권력과 지배의 관계를 산출하는 모든 비대칭적인 정보의 흐름은 제거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그가 요구하는 것은 쌍방향적인 조명이다. 위만 아래를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도 위를 감시한다. 모두가 모두를 가시성과 통제구역으로 몰아넣는다. 사적인 영역도 여기서 예외가 되지 않는다. 이런 전면적 감시 속에서 “투명한 사회”는 비인간적인 통제사회로 전락한다. 모두가 모두를 통제하는 것이다.
98p
신화는 오직 지와 무지의 중간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신뢰는 타인에 대한 무지에도 불구하고 그와 긍정적 관계를 맺게 한다. 신뢰는 무지에도 불구하고 행동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내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신뢰란 것은 아예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투명성이란 모든 무지가 제거된 상태를 뜻한다. 투명성이 지배하는 곳에서 신뢰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투명성이 신뢰를 만듭니다’라는 구호는 사실 ‘투명성이 신뢰를 철폐합니다’로 바뀌어야 한다.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바로 신뢰가 사라진 상황에서 높아진다.
신뢰 위에 세워진 사회에서는 투명성에 대한 집요한 요구가 생겨나지 않는다. 투명사회는 불신과 의심의 사회, 신뢰가 줄어들기에 통제에 기대하는 사회다.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는 것은 사회의 도덕적 기반이 취약해졌다는 것, 진실성이나 정직성과 도덕적 가치가 점점 더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도덕적 심금이 허물어지면서 그 자리를 투명성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명령이 대신한다.
99p
자기 착취는 자유의 감정을 동반하기에 타자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성과주체는 스스로 만들어낸 자유로운 강제에 예속된다. 이러한 자유의 변증법은 통제사회의 바탕이기도 하다. 자기 조명은 자유의 감정과 연결되어 있어서 타자 조명보다 더 효율적이다.
101p
소비자들은 자발적인 그들의 욕망을 조종하고 충족시키는 파놉티콘적 관찰의 시선에 몸을 내맡긴다. 여기서 소셜미디어는 더 이상 파놉티콘적 기계와 구별되지 않는다. 커뮤니케이션과 상업, 자유와 통제는 하나가 된다. 소비자에게 생산의 제반 상황을 공개하는 것은 투명성이 양방향적이라는 인상을 불러일으키지만, 결국에는 사회적인 것의 착취임이 드러난다. 사회적인 것은 생산 과정의 기능적 요소로 전락하고, 조작 가능하게 되며, 이로써 무엇보다도 생산 관계의 최적화에 봉사한다. 소비자가 누리는 가상의 자유에는 어떤 부정성도 없다. 그것은 시스템의 내부를 의문시할 어떤 외부도 만들지 못한다.
미주
108p
“균열”의 부정성을 하이데거는 “고통”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긍정사회는 “고통”을 회피한다. “숨지 않음”으로서의 진리는 부정성이 없는 빛도 아니고 투명한 방사선도 아니다. 진리는 숨어 있는 것을 양분으로 살아 존재한다. 진리는 어두운 숲에 둘러싸인 “빈터”이다. 이 점에서 하이데거의 진리는 부정성이 완전히 빠져버린 명증성 또는 투명성과 구별된다.
무리 속에서
존경 없이
115p
존경의 독일어 Respeke는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돌아보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존경은 배려이다. 타인을 존경하는 사람은 함부로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지지 않는다. 존경의 전제는 떨어져 있는 시선, 거리의 파토스이다. 오늘날 존경심이 사라지면서 거리를 알지 못하는 구경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것은 스펙터클의 특징이다. 스펙터클의 어원인 라틴어 동사 spectare는 거리를 둔 배려와 존경 없이 관음증적 태도로 쳐다보는 것을 의미한다.
116~117p
거리가 소멸한 결과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뒤섞인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영향으로 내밀하고 사적인 영역을 노골적으로 전시하는 경향이 강화된다. 소셜네트워크 또한 사적인 것의 전시 공간이 된다. 디지털 매체 자체가 정보의 생산을 공공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 이동시키고, 이로써 커뮤니케이션을 사적인 과정으로 만든다. 롤랑 바르트는 사적 영역을 “내가 어떤 이미지도, 어떤 대상도 되지 않는 시공간의 영역”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날 우리에겐 사적 영역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119p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명백한 위계질서는 없다. 모두가 송신자이자 수신자이고,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것이다. 그러한 대칭성은 권력에 대해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권력의 커뮤니케이션은 한 방향으로, 즉 위에서 아래로 진행된다. 커뮤니케이션에서 환류가 일어나면 권력의 질서는 파괴된다. 악플은 온갖 파괴적 결과를 초래하는 일종의 환류라고 할 수 있다.
120p
소음 또는 잡음은 권력의 붕괴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청각적 신호다. 악플 또한 커뮤니케이션의 소음이다. 권력의 아우라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카리스마는 악플에 대한 최상의 방패막이다. 권력의 카리스마가 있는 곳에서는 애초에 악플 같은 것이 불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122p
카를 슈미트에 따르면 비상사태를 결정하는 자가 곧 주권자이다. 우리는 이 명제를 다음과 같이 청각적인 차원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주권자는 절대적 고요를 생성할 수 있는 자, 모든 소음을 제거할 수 있는 자, 모두를 일거에 침묵시킬 수 있는 자이다.
122~123p
노년의 슈미트는 전파를 두려워해서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집에서 치웠다고 한다. 그는 심지어 전자기파 때문에 주권에 관한 자신의 유명한 명제를 고쳐 써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제1차 세계대전 뒤에 나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주권자란 비상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죽음에 즈음하여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주권자란 공간의 파동에 대한 처분 권한을 가진 자이다.” 디지털 혁명 이후 우리는 슈미트의 주권 명제를 다시 한 번 고쳐 쓰게 될 것이다. 주권자란 인터넷 악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자이다.
격분사회
126p
분노는 영웅적 행동의 공간 그 자체다. ‘일리아스’는 분노의 노래다. 이 분노는 일정한 행동을 촉발하기에 서사적이다. 그 점에서 분노는 격분의 물결에서 나타나는 감정인 화와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디지털적 격분은 노래할 수 없다. 디지털적 격분은 행동도 이야기도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강력한 행동도 이야기도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강력한 행동의 힘도 펼치지 못하는 감정적 상태일 뿐이다. 전반적인 산만함을 특징으로 하는 오늘의 사회는 분노의 서사적 에너지를 생성하지 못한다. 강력한 의미에서의 분노는 감정적 상태 이상의 것이다. 분노는 기존의 상태를 중단하고 새로운 상태를 시작하게 하는 능력이다. 그렇게 해서 분노는 미래를 만들어낸다. 오늘날 격분하는 군중은 극도로 덧없고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다. 그들에게는 행동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질량과 중력이 조금도 없다. 그들은 미래를 창출하지 못한다.
무리 속에서
127~128p
군중심리학자 퀴스타브 르봉은 저서 ‘군중심리’(1895)에서 근대를 “군중의 시대”로 정의한다. 이 시대는 인간의 사고가 막 근본적인 변화를 겪으려 하는 여러 위기의 시점 가운데 하나라고 르봉은 주장한다. 지금은 곧 “이행과 무정부의 시기”다. 미래의 사회는 그 조직에 있어서 새로운 권력, 즉 군중의 권력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르봉은 전통적 지배 질서의 붕괴를 목격한다. 이제 “민중의 목소리가 우위를 점하기에 이르렀다. 군중은 ”모든 권력자들을 좌지우지하는 조합, 모든 경제법칙을 거슬러 노동과 임금을 규제할 노동 거래소를 설립했다. 의회의 대표들은 그들의 하수인일 뿐이다. 르봉에게 군중은 새로운 지배 관계의 현상으로 나타난다.
르봉은 군중의 봉기가 주권의 위기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문화의 타락으로 귀결되리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군중은 “문화의 파괴자”다. 문화는 “멋대로 하도록 방치된 군중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조건들”을 바탕으로 세워진다.
오늘날 우리는 분명 다시 위기에 처해 있다. 또 하나의 변혁, 즉 디지털 혁명에 의해 촉발된 것으로 보이는 위태로운 이행의 과정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다수의 대오가 기존의 권력 및 지배 관계를 무너뜨리는 중이다. 이 새로운 다수의 이름은 디지털 무리다. 디지털 무리는 고전적인 다수의 대오, 즉 군중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특성을 나타낸다.
129~130p
디지털 무리는 그 속에 영혼, 정신이 없다는 점에서 이미 군중과 다르다. 영혼은 모여들고 통합되는 성질이 있다. 반면 디지털 무리는 고립된 여러 개인으로 이루어진다. 군중의 구조는 이와 전혀 다르다. 군중은 개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 특성을 드러낸다. 개개인은 하나의 새로운 통일체로 융합되며, 그 속에서 자기만의 특징을 잃어버린다. 사람들의 우연한 군집은 아직 군중을 형성하지 못한다. 일정한 영혼, 혹은 일정한 정신이 비로소 그들을 외부에 대해 닫혀 있는 하나의 동질적 군중으로 빚어낸다. 디지털 무리에서는 군중의 영혼, 군중의 정신 같은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무리 속에 모여든 여러 개인은 우리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디지털 무리에서는 집단을 행동하는 군중으로 엮어줄 정신의 합일을 찾아볼 수 없다. 디지털 무리는 하나의 목소리로 표출되지 않는다. 악플도 하나의 목소리는 아니다. 그 때문에 악플은 소음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매클루언에게 호모 엘렉트로니쿠스는 군중 인간이다. “지구의 전자 주민은 군중 인간으로서, 동시에 다른 모든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는 마치 글로벌 스타디움에 앉아 있는 한 명의 관람객 같다. 스타디움에 있는 관람객이 아무도 아닌 것처럼, 전자 시민도 과부하에 의해 심리적으로 개인적 정체성이 지워져버린 그런 인간이다.” 하지만 호모 디기탈리스는 결코 “아무도 아닌” 존재가 아니다. 그는 무리의 일부로 등장할 때조차 자신의 개인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익명으로 나타나지만 대개 일정한 특징을 지니며 그것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는 “아무도 아니”기는커녕 누군가로서 스스로를 전시하며 주목받고자 애쓴다. 반면 아무도 아닌 매스미디어의 인간은 자신에게 주목해줄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지워져 있다. 그는 군중 속에 녹아들어간다. 그것은 그의 행운이기도 하다. 그는 아예 아무도 아니기 때문에 익명일 수도 없다. 반면 호모 디기탈리스는 자주 익명으로 등장하지만 아무도 아닌 것은 아니다. 그는 누군가이다. 익명의 누군가인 것이다.
131p
스타디움과 원형극장은 군중의 공간이다. 인터넷의 디지털 주민은 집결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하나의 우리를 생성해낼 수 있는 집회의 내면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집결하지 않는 특별한 양상의 군집, 내면이 없는 무리, 영혼과 정신이 없는 무리다. 그들은 무엇보다 고립된 제 혼자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히키코모리다. 라디오와 같은 전자 매체가 사람들을 집결시킨다면, 디지털 매체는 사람들을 따로 떼어놓는다.
132p
마이클 하트와 아노티오 네그리에 따르면 세계화를 통해 상반된 두 개의 힘이 성장한다. 세계화는 한편으로 중심과 영토를 해체하는 자본주의적 지배 질서, 즉 “제국”을 수립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소위 “다중”, 즉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 커뮤니케이션하면서 행동을 함께하는 개별자들의 집단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다중은 제국 내부에서 제국에 대항한다.
133~134p
계급에 대한 논의는 오직 계급의 다수성이 전제되는 한에서만 유의미하다. 하지만 다중은 유일한 계급이다. 자본주의 체제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다중에 속한다. 제국은 다중을 착취하는 지배 계급이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사람들은 자유의 환각 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착취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성과주체는 착취자인 동시에 피착취자다. 하트와 네그리는 타자 착취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이 자기 착취의 논리를 알지 못하는 듯하다. 제국에서는 아무도 지배하지 않는다. 제국은 모두를 뒤덮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이다. 이렇게 오늘날에는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경제주체들은 행동을 함께할 수 있는 ‘우리’를 형성하지 못한다. 사회가 점차 원자화되고 자기중심주의가 강화되어감에 따라 행동을 함께할 수 있는 여지는 급격히 축소되며, 이로써 자본주의 질서를 정말로 위협할 수 있는 반대 세력의 형성도 어려워진다. 공동체는 단독자에 밀려난다. 다중이 아니라 고독이 오늘의 상황을 특징짓는다.
탈매개화
136p
디지털 매체는 현존의 매체다. 이 매체의 시간은 즉각적 현재를 본질로 한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중요한 특징은 정보가 어떤 중개자의 매개도 거치지 않고 생산되고 전송되고 수신된다는 데 있다. 정보는 중개자에 의해 조종되거나 걸러지지 않는다. 정보 전달 과정에 개입하는 중간 심급은 속속 철폐되어간다. 매개와 대표를 통하는 것은 불투명하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시간과 정보의 정체를 일으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138~139p
점증하는 탈매개화의 압력은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로 인해 대의 민주주의는 위기에 몰리고 있다. 정치적 대표자들은 중간 전달자가 아니라 장벽으로 간주된다. 그리하여 탈매개의 압력은 더 많은 참여와 투명성의 요구로 표출된다. 해적당이 초기에 거둔 성공은 바로 이러한 매체의 발전 덕택이었다. 디지털 매체가 만들어내는 참가의 강박은 전반적으로 대표의 원리를 위협한다.
139~140p
기자들은 최고의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때로 생명의 위험도 마다하지 않는다. 반면 탈매개의 경향은 많은 분야에서 대중화를 초래한다. 언어와 문화는 평이해지고 저속화의 길을 걷는다.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벨라 안드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책은 빨리빨리 나와요. 내 아이디어에 대해 먼저 에이전시를 설득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난 독자가 원하는 책을 바로 쓸 수 있습니다. 나는 곧 나의 독자인 셈이죠.” “나는 곧 나의 독자”라는 말은 “나는 곧 나의 유권자”라는 말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 말은 진정한 정치가, 즉 자신의 관점을 고수하면서 유권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나름의 비전으로 유권자를 한발 앞서 가는 정치가의 소멸을 의미한다. 정치적인 시간으로서의 미래는 사라져간다.
142p
글쓰기 자체를 투명하게 만들자는 요청은 곧 글쓰기를 폐기하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글쓰기는 배타적인 행위다. 반면 집단적인 투명한 글쓰기란 단순히 덧붙이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글쓰기는 완전히 다른 것, 유일무이한 것을 생성해내지 못한다. 투명한 글쓰기는 그저 정보들을 합산할 따름이다. 디지털의 걸음걸이 또한 가산적이다. 투명성의 요구는 참여와 정보의 자유를 뛰어넘어 패러다임의 전환을 예고한다. 그것은 무엇이 있는지,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규범적이다. 그것은 새로운 존재를 정의한다.
영리한 한스
145p
커뮤니케이션에서 언어의 비중은 매우 작다. 몸짓이나 얼굴 표정과 같은 비언어적 표현 형식이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에서 더 본질적이다. 이러한 요소로 인해 커뮤니케이션은 촉각적 특징을 띠게 된다. 여기서 촉각성이란 단순히 신체 접촉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각뿐만 아니라 다른 감각들도 관련되어 있는 인간 지각의 다차원성과 다충성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디지털 매체는 커뮤니케이션에서 촉각성과 육체성을 제거해버린다.
148~149p
스카이프 덕택에 우리는 하루 24시간 내내 가까이 있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줄곧 서로 다른 데를 쳐다보고 있는 셈이다. 서로 다른 데를 보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비단 카메라의 각도 때문만은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시선의 근원적인 부재, 타자의 부재에 있다. 디지털 매체는 우리에게서 점점 더 타자를 빼앗아간다.
151p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베일로 가려진 초상화에 대해 다음과 같은 언급을 남겼다고 한다. “그대가 자유를 사랑한다면 베일을 거두지 말라. 나의 얼굴은 사랑의 감옥이니까.” 이 문구는 페이스북의 시대에는 불가능해진, 얼굴에 대한 특별한 경험을 표현하고 있다. 자기를 전시하고 주의를 끌어보려고 애원하는 페이스는 얼굴이 아니다. 페이스 속에는 시선이 담겨 있지 않다. 전시의 의도는 시선의 본질을 이루는 내면성, 내적 자제심을 파괴한다. “실제 그는 아무 것도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사랑과 불안을 속에 붙잡아두고 있다. 바로 이것이 시선이다.” 전시된 페이스는 나를 매료시키고 꼼짝 못하게 만드는 상대, 얼굴을 지닌 상대가 아니다. 사랑의 감옥은 오늘날 자유의 지옥으로 대체되고 있다.
이미지의 도피
153p
모상으로서 최상의 상태로 다듬어진 현실을 재현하는 이미지들은 이미지 본연의 형상적 가치를 파괴한다. 그런 이미지들은 그저 실재의 인질로 붙들려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 이미지의 홍수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이미지의 홍수로 인해 우상파괴자가 되었다. 소비 가능하게 만들어진 이미지들은 실제의 단순한 모상이며, 이미지의 특별한 의미론과 시학을 파괴한다. 이미지들은 소비되기 위해 길들여진다. 이미지 길들이기를 통해 이미지의 광기가 소멸한다. 그리하여 이미지는 진실을 잃어버린다.
155p
이창(Rear Window)과는 달리 디지털 윈도우에서는 실재, 타자의 침입 위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디지털 창문이라 할 수 있는 윈도우는 우리를 이창보다 더 효과적으로 실재에서 지켜준다. 윈도우는 보편화된 상상의 원리를 따른다. 디지털 매체는 아날로그 매체보다 실재에서 더 멀어진다. 디지털과 실재 사이에는 유사성이 줄어든다.
156~157p
바르트는 아날로그 사진에서 시간의 부정성을 본질적 구성 요소로 하는 생의 형식을 발견한다. 반면 디지털 이미지, 디지털 매체는 이와는 다른 생의 형식과 결부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성장과 노화, 탄생과 죽음이 모두 지워져 있다. 영구적인 현존과 현재가 디지털 매체의 특징이다. 디지털 이미지는 피어나지도 광채를 발하지도 않는다. 피어남에는 시듦의 부정성이, 광채에는 그림자의 부정성이 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손에서 손가락으로
159p
태어남이 정치적 사유의 기반을 이룬다면, 죽음은 형이상학적 사유의 불꽃으로 타오르게 하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게 본다면 죽지 않는 자의 디지털 시대는 정치적이지도 형이상학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포스트정치적이고 포스트형이상학적이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연장해야만 하는 벌거벗은 생명에는 탄생도 죽음도 없다. 디지털 시간은 포스트탄생, 포스트죽음의 시대인 것이다.
160~161p
“손 없이 손가락질만 하는 미래의 인간.” 즉 호모 디기탈리스는 행동하지 않는다. “손의 위축증”으로 인해 인간은 행동 능력을 상실한다. 뭔가를 손질하고 다듬는 것은 일정한 저항을 전제한다. 행동 역시 저항을 극복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행동은 기존의 지배적인 힘에 새로운 것, 다른 것을 맞세우는 일이다. 행동에는 부정이 내포되어 있다. 행동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추구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다른 무언가에 대한 반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의 긍정사회는 모든 저항적 형식을 회피하며, 이로써 행동을 소멸시킨다. 이 사회 속에는 그저 동일한 것의 다양한 상태들만 있을 뿐이다.
164p
더 많은 자유를 약속하는 스마트폰에서 하나의 치명적인 강제가 생겨난다. 커뮤니케이션에의 강제, 사람들은 최근 들어 디지털 기기와 거의 강박적 관계에 빠져들었다. 여기서도 자유는 강제로 전도된다. 소셜네트워크는 커뮤니케이션에의 강제를 엄청나게 강화한다.
“디지털”이라는 단어는 본래 손가락이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digitus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세는 손가락이다. 디지털 문화는 세는 손가락을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역사는 이야기이다. 역사는 세지 않는다. 셈은 포스트역사적 범주다. 트윗도 정보도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되지 않는다. 타임라인은 서사적이기보다 가산적이다. 디지털 인간은 끊임없이 세고 계산한다는 의미에서도 손가락질하는 인간이다. 디지털은 수와 셈을 절대화한다. 페이스북 친구들도 무엇보다 숫자로 세어진다.
농부에서 사냥꾼으로
167~169p
하이데거의 손은 행동하지 않고 생각한다. “손의 작업 속에서 손의 모든 운동은 사유의 특성을 통해 유지되고 사유의 특성을 나타낸다. 손의 모든 작업은 사유 속에 바탕을 둔다.” 사유는 손의 작업이다. 그렇다면 손의 디지털 위축증은 사유 자체를 위축시킬 것이다. 하이데거가 손을 그토록 단호하게 행동에서 떼어내어 사유에 접근시키는 것은 흥미롭다. 에토스가 아니라 로고스가 손의 본질을 이룬다. 이때 하이데거는 거두는 농부의 손에서 로고스를 이끌어낸다. “이런 모아들이는 작업이 없다면, 즉 이삭줍기나 포도 따기와 같은 거둠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 한 개의 단어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이로써 하이데거는 로고스가 경작지를 돌보고, 씨 뿌리고, 쟁기질하는 농부의 아비투스와 유사한 것으로 본다.
169~170p
오늘날 네트워크로서의 세계에는 들판의 저 거친 바람 대신 디지털 폭풍이 불어대고 있다. 디지털 태풍 속에서 하이데거의 “거주”는 불가능하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농부의 “땅”은 디지털의 대척점에 놓여 있다. 땅은 “본질적으로 열리지 않는 것”, “닫혀 있는 것”이다. 반면 디지털은 투명성의 강제를 낳는다. “땅”은 투명성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땅의 폐쇄성은 정보에게는 근본적으로 낯선 것이다. 정보는 그 본질에 있어서 공개되어 있는 것, 혹은 공개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투명사회의 명령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이 정보로서 공개되어야 하고, 모두가 정보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투명ㅇ성은 정보의 본질이다. 투명성은 디지털 매체의 걸음걸이다.
173p
권력은 커뮤니케이션의 비대칭성을 강화한다. 비대칭성의 정도가 클수록 그만큼 권력도 더 강한 것이다. 반면 디지털 매체는 진정한 커뮤니케이션 관계, 즉 대칭적 커뮤니케이션 관계를 창출한다. 정보의 수신자인 동시에 송신자이기도 하다. 이런 대칭적 커뮤니케이션 공간에서는 권력관계의 정립이 그리 쉽지 않다.
주체에서 프로젝트로
176p
하이데거의 농부는 주체다. 주체는 본래 예속된 존재를 의미하는데, 농부는 대지의 노모스에 예속되어 있는 것이다. 대지의 질서는 주체를 낳는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 실존의 근본 상황은 “던져져 있음”이다. 오늘날 우리는 하이데거의 실존 철학을 새로 써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제 자신이 예속된 주체가 아니라 스스로를 설계하는, 스스로를 최적화하는 프로젝트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177p
각각의 존재 형식, 또는 삶의 형식은 위기의 국면에서 어떤 새로운 표현 양식을 강요하는데, 그러한 표현 양식은 새로운 매체를 통해 비로소 완전한 실현에 이르게 된다. 삶의 형식은 일정한 매체 의존성을 지닌다. 그래서 주체가 프로젝트에 접근하는 과정은 디지털 매체가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완결된다. 디지털은 프로젝트 매체다.
178p
디지털적인 점우주 속에서 모든 확고한 단위는 해체된다. 주체도 대상도 없다. “우리는 더 이상 주체일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체가 될 수 있게 해 주는 대상도, 대상에 대해 주체가 될 수 있는 어떤 단단한 핵심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플루서에 따르면 오늘날 자아는 “서로 가로지르는 가상현실들의 교차점”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역시 “가능성들의 매듭”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관계들, 무엇보다 인간관계들이 들판을 가로지르며 이룬 모퉁이 혹은 후미로 이해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윙윙거리며 날아다니는 가능성의 점들로 이루어진 ‘디지털 계산 수치들’이다.”
180p
플루서에 따르면 정보사회는 “자아의 이데올로기를 철폐하여 우리가 타인을 위해 존재하고 그 누구도 독립적으로 있는 게 아니라는 인식을 확립하기” 위한 “전략”이다. 정보사회는 “상호주체성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자아의 철폐”를 “자동적으로” 이룩한다.
180~181p
“이것이 내가 품고 있는 그림이다. 내가 상파울로에 있는 친구와 컴퓨터 통신으로 소통할 때, 공간이 휘면서 그는 나에게 오고 나는 그에게 간다. 그뿐만 아니다. 시간도 휘어 과거는 미래가 되고 미래는 과거가 되어 둘 다 현재처럼 된다. 그것이 상호주체성에 대한 나의 경험이다.” 이러한 네트워크 메시아주의는 실현되지 못했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오히려 공동체, ‘우리’를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그것은 공적 공간을 파괴하고 인간의 고립화 경향을 강화한다. “이웃 사랑”이 아니라 나르시시즘이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을 지배한다. 디지털 기술은 “이웃 사랑의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나르시시즘적 에고 기계임이 드러난다. 디지털 기술은 대화적 매체도 아니다. 플루서의 사상 전반을 규정하는 대화성의 관념은 네트워크에 대한 그이 생각에도 과도한 영향을 미친다.
181~182p
우리는 오늘날 자유 자체가 강제를 촉발하는 특수한 역사적 단계에 처해 있다. 자유는 본래 강제의 반대 형상이다. 그런데 강제의 반대 형상이 강제를 낳는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은 자유는 더 많은 강제를 의미한다. 그것은 자유의 종말일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막다른 골목에 와 있다. 우리는 앞으로 갈 수도, 뒤로 갈 수도 없다. 이처럼 자신의 대립자로 전도되는 자유의 치명적인 변증법을 플루서는 완전히 간과한다. 그 원인은 그의 메시아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의 사회는 서로를 돕는 “이웃 사랑”의 사회가 아니다. 이 사회는 우리를 따로따로 떼어놓는 성과사회다.
대지의 노모스
183p
하이데거는 대지의 질서에 대한 마지막 위대한 옹호자였다. 하이데거의 “땅”은 “단지 계산적으로 귀찮게 할 뿐인 모든 행위를 파괴로 전도”시킨다. 디지털 질서에서는 바로 계산적인 것, 가산적인 것이 전부가 된다. 대지의 질서는 확고한 기반 위에 세워져 있다. 이 질서의 법칙은 노모스라고 한다.
184p
디지털 질서는 대지의 노모스와 완전히 결별한다. 카를 슈미트는 대지를, 무엇보다도 대지의 단단함을, 그로 인해 가능해지는 명확한 경계와 구별을 찬양한다. 대지의 질서는 벽과 경계선과 요새로 이루어져 있다. 유동적인 호모 디기탈리스에게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불변의 “성격” 또한 대지의 질서에 속한다. 반면 디지털 매체는 “확실한 선을 새겨넣을 수 없는”, “바다”를 닮았다. “성격이라는 단어는 새겨넣기, 파기, 인각하기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charassein에서 왔는데”, 디지털 매체는 그런 본래 의미에서의 성격을 허용하지 않는다.
186p
사랑 또한 증오의 부정적 긴장 속에 묶여 있다. 그리하여 사랑은 참/거짓, 선/악과 동일한 질서에 속한다. 부정성을 지닌 사랑은 긍정적이기에 가산적이고 축적 가능한 좋아요와 구별된다. 페이스북 친구들에게서도, 그 경쟁자들에게서도 카를 슈미트적인 의미에서 친구와 적을 갈라놓는 부정성은 찾아볼 수 없다. 가까움과 멂을 제거하고 무거리의 상태를 만든다. 거리의 단순한 제거를 의미하는 무거리성은 긍정적 특성이다.
정신은 타자를 대면할 때 깨어난다. 타자의 부정성이 정신의 생명을 유지한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 자기 속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은 정신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다. 정신의 특별한 능력은 “자신의 개별적 직접성에 대한 부정을, 무한한 고통을 감내”할 수 있다는 데 있다.
187p
타자에 직면할 때 찾아오는 문턱의 감정, 즉 고통은 정신의 매체다. 정신은 고통이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고통스러운 삶을 묘사한다. 반면 디지털의 현상학은 정신의 변증법적 고통과 무관하다. 그것은 좋아요의 현상학이다.
디지털 유령
190p
사물 인터넷은 새로운 유령을 낳는다. 한때 침묵하던 사물들이 말을 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작위 없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사물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은 유령들에게 새로운 양분을 제공한다. 이로써 세계는 더욱 유령 천지가 된다. 사물들의 자동적 커뮤니케이션은 마치 유령의 손에 조종되는 듯이 보인다.
커뮤니케이션의 역사는 돌을 점점 더 빛나게 해온 역사로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정보를 광속으로 보내는 광학 매체의 등장이 마침내 커뮤니케이션의 석기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다. 실리콘조차 조약돌을 의미하는 라틴어 silex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이데거의 저작에서도 돌이 자주 등장하는데, 특히 “단순한 사물”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는 경우가 많다. 돌은 가시성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어떤 것이다.
191p
사물로서의 돌은 투명성의 반대 형상이다. 돌은 땅에, 대지의 질서에 속하며 숨겨진 것, 닫혀 있는 것을 상징한다. 오늘날 사물은 날로 중요성을 잃어간다. 사물은 정보에 예속된다. 정보는 유령에 새로운 양분이 된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구체적인 것은 사물이 아니라 정보다. 우리의 환경은 눈에 띄게 연성화되고 안개처럼 흐릿해지고, 유령 같아진다.”
193p
투명사회에도 이면이 있다. 투명사회란 어떤 의미에서 표면적 환상이다. 투명사회의 뒤편, 또는 그 아래에서, 모든 투명성을 벗어나는 유령들의 공간이 생겨난다. 이를테면 다크풀(Dark Pool)은 익명의 금융상품 거래를 뜻한다. 금융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이른바 고속 거래는 결국 유령과의 거래, 또는 유령 사이의 거래다. 서로 커뮤니케이션하고 전쟁을 치르는 것은 알고리듬과 기계들이다.
정보의 피로
195~196p
발터 벤야민이 영화의 수용 형식을 “충격”이라고 명명한 것은 1936년의 일이다. 벤야민은 충격이 회화작품에 대한 수용 태도인 관조를 대신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충격 개념은 오늘의 지각에 대한 성격 규정으로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충격은 일종의 면역 반응으로서, 그런 의미에서 구토와 유사한 점이 있다. 오늘날 이미지는 충격을 유발하지 못한다. (정글캠프-독일 상업방송 RTL의 예능 프로그램. 본 제목은 ‘나는 스타예요. 여기서 꺼내줘요’이다.-같은 프로그램의) 구역질나는 이미지조차 오락거리일 뿐이다. 그런 이미지도 소비 가능하게 만들어진다. 모든 것이 소비의 대상이 됨에 따라 모든 형태의 면역학적 반발도 소멸한다.
196~197p
정보피로증후군(IFS: Information Fatigue Syndrome)은 정보의 과다에서 오는 심리 질환이다. 환자들은 분석적 능력의 저하, 주의산만증, 전반적인 불안감,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무기력함을 호소한다. 1996년에 영국의 심리학자 데이비드 루이스가 이 개념을 만들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IFS는 직업상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양의 정보를 다루어야 하는 사람들의 질병이었다. 오늘날은 모두가 IFS의 희생자다.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미친 듯이 늘어나는 정보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IFS의 주요 증상은 분석적 능력의 마비다. 분석적 능력이야말로 사유의 본질을 이루는 부분이다. 따라서 정보의 과다는 사유의 위축으로 귀결된다. 분석적 능력이란 곧 지각 자료에서 본질에 속하지 않는 모든 것을 걷어낼 수 있는 능력이다.
197~198p
더 많은 정보가 필연적으로 더 나은 결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정보량의 증가는 오히려 고차적인 판단 능력을 위축시킨다. 종종 더 적은 정보가 더 많은 것을 가져다준다. 생략과 망각의 부정성이 오히려 생산적이다. 더 많은 정보와 커뮤니케이션만으로 세계가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 또 투명성으로 눈이 환해지는 것도 아니다. 진리는 대량의 정보에서 나오지 않는다. 대량의 정보는 어둠에 빛을 비추어주지 못한다. 정보가 많이 유포될수록 세계는 더 어지럽고 유령스러워진다.
재현/대표의 위기
201p
바르트가 다음과 같이 쓸 때, 그는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생각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사진은 본성상 뭔가 동어반복적인 면이 있다. 사진에서 파이프는 언제나 파이프다.” 그는 왜 그토록 열렬히 사진의 진실을 강조하는가? 그는 실재하는 지시체와 재현의 궁극적인 분리를 초래할 디지털 시대의 도래를 예감했던 것일까?
202p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디지털 사진은 하이퍼포토그래피로서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하이퍼리얼리티를 제시한다. 실재는 그 속에서 오직 인용 혹은 파편으로서만 현존한다. 실재에서 따온 다양한 조각들이 서로 연결되고, 상상적인 것과 뒤섞인다. 이로써 하이퍼포토그래피는 지시체에서 완전히 분리된 자기지시적인 하이퍼리얼 공간을 창출한다. 하이퍼리얼리티는 아무 것도 재현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제시할 뿐이다.
204p
오늘날 모든 사람이 각자 하나의 정당이라면, 한때 정치의 지평을 이루었던 이념이 수많은 개별적 의견과 옵션으로 해체되어버린다면, 대체 정당은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모두가 자기 자신만을 대표한다면, 정치적 대표자들은 누구를 대표한단 말인가?
시민에서 소비자로
205p
1970년대에 미국에서는 QUBE(question your tube)라는 쌍방향 기능을 가진 텔레비전 수상기가 발매되었다. 이름 속에 들어 있는 질문이라는 말은 상호작용의 가능성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 기기에는 키보드가 장착되어 있어서, 이를테면 모니터에 보이는 몇 가지 옷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가능했다. 또한 간단한 선거도 이 텔레비전을 통해 치를 수 있었다.
206p
플루서는 QUBE 시스템을 출발점으로 삼아 미래의 민주주의를 상상한다. QUBE 시스템은 “직접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플루서는 오직 지식과 역량만이 중요한 의리를 지니는 “탈이념적 민주주의”를 꿈꾼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QUBE 시스템에서는 모든 참가자의 역량과 각 역량의 중요성이 어떤 이념과도 무관하게 명백히 드러난다.” 이와 같은 탈이념적 민주주의에서 정치가는 시스템을 관리하고 최적화하는 전문가로 대체된다. 그렇게 될 때 정치적 대표자도 정당도 불필요해질 것이다.
207~208p
플루서가 말하는 “직접 민주주의”는 네트워크에 관한 그의 사상만큼이나 유토피아적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그의 믿음과 달리 본래 의미의 정치적 결정은 언제나 실존적인 결정일 수밖에 없다. “순간적으로 효과를 발하는”, “점적, 원자적 결정”은 크게 책임이 따르지 않는 사소한 구매 결정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QUBE 화면에서 선거와 구매의 차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람들은 쇼핑하듯이 선거한다. 그리하여 “뮤즈”는 곧 쇼핑임이 드러난다. 이때 주체는 호모 루덴스가 아니라 경제적 인간, 호모 오이코노미쿠스다.
완전한 생의 프로토콜
210~211p
디지털 파놉티콘에서는 신뢰가 불가능하다. 아니, 그 이전에 신뢰에 대한 필요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신뢰는 믿음의 행위다. 그것은 어디서나 정보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현실로 인해 낡아빠진 관념이 되어버렸다. 정보사회는 모든 믿음을 불신한다. 과거에 사람들은 신뢰 덕택에 잘 알지 못하는 타인과도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정보를 쉽고 빠르게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신뢰에 타격을 입힌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날 신뢰의 위기는 매체적 조건과도 관련이 있다. 디지털 네트워크는 정보의 획득을 지극히 용이하게 만들고, 이로 인해 신뢰라는 사회적 관행은 점점 더 중요성을 상실하게 된다. 신뢰는 통제로 대체된다. 그래서 투명사회는 감시사회와 구조적 유사성을 보인다.
심리정치
217~218p
푸코에 따르면 권력은 17세기 이후로 더 이상 죽음의 형벌을 내리는 주권자의 권력이 아니라 생권력으로 표출된다. 주권자의 권력은 칼의 권력, 즉 죽음의 위협을 가하는 권력이다. 반면 생권력은 “권력에 예속된 힘을 자극하고 강화하고 통제하고 감시하고 증대시키고 조직하는” 식으로 작용한다. 생권력의 목적은 “힘을 막고 굽히고 파괴하기보다는 힘을 생성하고 키우고 정돈하는 것”이다. 주권자가 지닌 죽음의 권력은 주민을 세심하게 관리하고 통제하는 생권력으로 대체된다. 생권력은 죽음권력보다 훨씬 더 촘촘한 그물망과 더 큰 정밀성을 자랑한다. 죽음권력은 너무 성긴 까닭에 통제권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생권력은 생물학적 과정과 법칙에 개입하며, 이로써 주민을 조종하고 인도한다.
218p
오늘날에는 또 한 차례의 패러다임 전환이 진행되고 있다. 디지털 파놉티콘은 생정치적 규율사회가 아니라 심리정치적 투명사회다. 그리고 생권력의 자리에는 심리권력이 대신 들어간다. 심리정치는 디지털 감시의 힘으로 생각을 읽고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신뢰할 수 없고 비효율적인 빅브라더의 원근법적 시선이 이제 디지털 감시로 대체된다. 디지털 감시는 바로 일정한 시점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대단히 큰 효율성을 발휘한다. 이로 인해 심리정치는 심리적 과정에 개입할 수 있다. 반면 인간 심리에의 섬세한 접근은 생권력에게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219p
“어마어마한 데이터의 시대에 성장한 구글 같은 기업들은 오늘날 잘못된 모델을 채택하지 않아도 되다. 아니, 어떤 모델을 채택할 필요 자체가 없다.” 빅데이터의 분석은 행동 패턴을 알려주며, 이로써 미래의 예측까지 가능해진다. 가설적인 이론 모델은 직접적인 데이터 비교로 대체된다. 상관관계가 인과관계를 밀어낸다. 왜 그런가라는 질문은 그냥 그런 것이라는 확인 앞에서 의미를 잃어버린다. “언어학에서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인간 행동에 관한 모든 이론은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분류법, 존재론을 잊어버려라. 심리학도 잊어버려라.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대체 누가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그냥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역사상 유래가 없는 정밀함으로 그것을 탐지하고 측정할 수 있다.
역자 해제
229p
인간 문명은 부정성을 극복하고 스스로의 계획과 의지에 따라 세계를 제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전진해왔다. 문명의 진보는 곧 부정성의 축소인 것이다. 특히 서양의 근대에 이르러 부정성의 축소 과정은 인류 전체의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자각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된다. 이 과정은 상이하지만 긴밀하게 연결된 두 차원에서 동시에 전개되었다. 하나는 자연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비약적인 부정성의 축소로서, 과학기술의 발전과 산업화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 관계에서 일어난-역시 비약적인-부정성의 축소로서, 이는 정치적 민주화와 함께 개체로서의 인간이 권력, 종교, 이데올로기 등에 의한 사회적, 집단적 구속에서 점차 해방되어가는 과정으로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230p
이러한 상황에서 한병철은 우리의 당면 위기가 궁극적으로 부정성이 지나치게 축소되었다는 사실 자체에서 온 것이라고 지적한다. 한병철은 근대가 철저하게 퇴치하려고 싸워온 부정성이 사실은 인간의 삶을 떠받쳐온 버팀목이었다고 본다. 싸워야 할 적으로서의 부정성도, 또는 반드시 순종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적, 자연적 전제로서의 부정성도, 모두 인간의 삶에 일정한 위치와 방향과 의미를 정해주는 중요한 기능을 해왔다는 것이다. 부정성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는 이정표였다. 반면 오늘날 막대한 자유 공간을 확보한 인간의 의지는 정박할 닻을 내리지 못하고 방향을 상실한 채 이리저리 떠돌고 있다. 그것이 이 시대가 당면한 위기의 본질이다.
232p
계몽주의는 너무나 많은 부정성, 너무나 많은 어둠 속에서 발생한 정신적 운동이었다. 계몽주의가 던진 이성의 빛은 바로 그러한 부정성과의 격렬한 대립을 통해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과도한 조명 속에 시달리고 있는 오늘날의 투명사회에서 계몽주의의 빛은 쓸모없는 잉여를 혹은 시대착오일 뿐이다. 또한 근대의 계몽주의적 의미에서 진리 탐구는 오늘날 더 많은 정보와 투명성에 대한 요구와는 완전히 성격을 달리한다. 근대는 진리를 향한 열정에서 위대한 과학과 이론을 낳았다. 과학과 이론은 정보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