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사회
- 줄리언 바지니 지음/오수원 옮김/(주)예문아카이브 펴냄/2018.8.23
서론
9~10쪽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제 진실은 더 이상 단순하거나 분명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렸다. 아닌 게 아니라 이제는 진실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언사, 존재하는 것은 다양한 의견뿐이며, “당신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거나 “내가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뿐”이라는 언사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구글(Google)의 엔그램 뷰어(N-Gram viewer)가 수백 만 권의 단행본과 텍스트를 훑어본 바에 따르면, 21세기로 들어서면서 ‘진실’이라는 단어의 빈도는 150년 전에 비해 약 3분의 1로 감소했다. 명백하고 단순한 진실의 감소 추세는 그보다 훨씬 더 가파르다.
문제는 우리가 ‘진실’의 의미가 무엇인지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아니다.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라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진실을 두고 내렸던 고대의 정의를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실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요, 존재하는 것을 존재한다고 말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진실이다.”
종교적 진실
22쪽
<<모르몬경>>보다 훨씬 더 많은 신뢰를 받는 경전은 많다. 그러나 그 중에 전 세계 대다수의 사람들이 진정한 신의 계시라고 믿는 경전은 하나도 없다. 그 각각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어떤 경전이건 이른바 계시를 받은 경전에 대한 의견은 그것이 전혀 계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와 동시에 계시를 받은 경전 하나 또는 여러 개가 계시에 의한 것이라고 믿는 이들도 있다.
경이로운 역설은 이제부터다. 대다수가 대다수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역설이다. 다시 말해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른 대다수 사람들이 거짓이라고 판단하는 계시의 존재를 최소한 하나는 믿고 있는 것이다. 군중의 지혜를 신뢰하는 누구에게나 유익한 교훈이 될 만한 역설이다.
29쪽
그 누구도 신학을 과학으로, 신화를 역사로 오인해서는 안 된다. 만일 어떤 영원한 진리가 존재한다면, 그것들이 특별해질 수 있는 까닭은 평범한 경험적 종류의 진실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종교적 진실을 평범한 경험적 종류의 진실로 취급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을 방어해내기는커녕 오히려 훼손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진리’에 관해 말하기를 피해야 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종교의 지식과 세속의 지식이 충돌하는 것은 실재에 관해 경합하는 진리 중 진짜 진리를 제공하는 것은 자신뿐이라고 생각할 때다. 이들의 공존은 각자가 말하는 진실의 종류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권위적 진실
40쪽
전문가의 의견을 바탕으로 어떤 전문가를 따를지 결정할 경우, 우리는 신뢰할 만한 전문가를 결정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에 합당한 전문가를 또 골라야 하는 난감한 역설에 바지게 된다.
결국 전문가에 대한 우리의 선택은 어쩔 수 없이 실제로는 우리 자신의 주관적 판단을 바탕으로 한 것이 된다. 그 판단이 온전한 정보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어도 어쩔 수 없다. 요컨대 우리는 누구의 판단이 권위 있는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 우리 자신이 내리는 판단의 권위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이 악순환을 빠져나갈 방법은 사실상 없다. 인간 이성의 더러운 비밀은 우리가 자신의 판단을 이성적으로 완벽하게 정당화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결국 자신의 판단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체념하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타당한 근거와 증거에 주의를 기울이면 자기 혼자만의 통찰이 수행하는 역할을 최소화하고 시실과 증거 그리고 건전한 추론의 역할을 최대화할 수 있다. 물론 사실을 논리적으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안이한 생각은 금물이다.
41쪽
우리 자신의 판단과 다른 전문가들의 증언 사이에서 올바른 균형을 찾는 일은 지극히 어렵고, 탈진실의 세계는 무리한 줄타기를 감행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곤경은 전문성을 가진 권위자들이 배짱과 직감에 의해 늘 묵살과 폄훼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과, 전문성이 박탈당한 자리를 인간 또는 신이 꿰차고 앉아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전 생애를 바쳐 특정 분야를 연구해 온 진정한 전문가들의 지혜와 식견이 충분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세계는 합리적인 세계와 완전히 결별한 다른 세상이 아니라, 여러 가지의 균형이 맞지 않게 되어버린 세상일 뿐이다.
진짜 진실에 관심이 있다면 우리를 진실로 인도하는 듯 보이는 권위자들을 완전히 거부해서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수용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자신이 권위를 부여하는 인물에 관해, 그리고 어떤 근거에서 그 같은 권위를 부여하는지에 대해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한심할 만큼 정보가 부족한 상태로 판단을 실행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계몽주의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가 내린 ‘사페레 아우데(Sapere Aude!)’라는 명령의 함의다.
은페적 진실
44쪽
비판과 조롱의 뜻으로 9.11 음모론 ‘신봉자들(truthers)’이라고 불리는 그들은, 첩보 작전에서 토목공학 분야에 이르는 전문가들뿐 아니라 대다수의 대중으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한다. 그들은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이 영화사에서 조작한 사건이라거나, 나치의 유태인 홀로코스트(Holocaust)가 사실이 아니라거나, 세상이 일루미나티(Illuminati)나 도마뱀처럼 생긴 외계인이 인간 형상을 한 존재들로 이뤄진 비밀 조직에 의해 지배받는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같은 정신 나간 음모론자들과 한패 취급을 당한다.
물론 이 음모론 신봉자들은 거의 확실히 틀렸지만, 거들먹거리는 비웃음으로 이들을 묵살하는 것이 올바른 처사는 아니다. 음모론이 사라지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일부 사람들이 광기에 사로잡혔기 때문이 아닌, 일부 진실이 역사적으로 은폐되어 왔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47쪽
일찍이 플라톤이 언급한 바 있는 ‘기게스의 반지(Ring of Gyges)’, 즉 착용한 사람을 투명인간으로 만드는 마법의 반지가 전하는 교훈만 알아도 충분히 추론 가능한 일이다. 소크라테스의 들러리 격 인물인 글라우콘(Glaucon)은 그런 반지를 낀 누구도 “정의를 굳건히 지킬 만큼 강철 같은 인격을 갖고 있으리라고 상상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원하는 물건은 뭐든지 훔칠 수 있을 테고,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와라도 동침할 수 있을 것이다. 거짓말 또한 기게스의 반지처럼 우리의 사악함을 은폐한다. 사악함을 발각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모든 사람들이 이 같은 은폐용 망토를 자신의 이익에 이용하지는 않겠지만,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하리라는 것 정도는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일부 음모론이 진실로 판명되는 이유는 이런 식의 은폐를 자신의 이익에 활용하는 자들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사례는 미국 중앙정보부가 미디어를 조종한다는 음모론이다.
49쪽
이들이 왜 틀렸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공학 관련 전문 지식이 있거나 그런 지식을 갖춘 전문가들을 신뢰해야 한다. 전문 지식이 없는 우리로서는 전문가들을 신뢰하는 선택지를 받아들이는 것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그러나 권위자에 대한 대중의 신뢰는 사상 최저치로 추락해버렸다. 정치가로 변신한 이탈리아의 코미디언 베페 그릴로(Beppe Grillo)가 했던 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세상을 정복하는 자들은 아마추어들이고, 나는 그래서 기쁘다. 전문가들이야말로 세상을 이 꼴로 만들어 놓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전문가에 대한 이런 식의 폄훼를 불합리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매우 중요한 의제에서 전문가들이 저질러온 잘못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지방과 당분 중 건강에 더 나쁜 것은 무엇인가에 관한 평가, 세상 모든 컴퓨터에 위험이 닥친다고 했던 ‘밀레니엄 버그(Millennium Bug)’ 예언, 이라크 내 대량 살상 무기의 존재 여부에 대한 판단, 세계 금융 시장의 건전성 평가, 유로화 도입의 장점 등의 쟁점을 다루는 데 있어서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실제로 많은 오류를 저질렀다.
이성적 진실
57쪽
스피노자가 생각하기에 이런 인식의 가치는 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는 것이었다. 스피노자는 “사물을 영원의 상 아래에서(sub specie aeternitatis) 보는 것이 이성의 본질”이라고 썼다.
완고한 합리주의 철학자들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들은 이성의 힘에 대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야심만만한 주장 대부분을 포기했다. 많은 수의 철학자들이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가 했던 다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순수이성을 통해 절대 진리에 도달하는 일은 단연코 불가능하다.”
데이비드 흄은 18세기에 이미 합리주의의 근원적 결함을 밝혀냈다. 그에 따르면 순수이성이 분석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개념들 간의 관계뿐이었다. 순수이성은 개념들이 관계하는 세상 만물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예컨대 “1+1=2”라는 설명은 숫자에 대한 진리를 말하지만, 사물 두 개를 더했을 때 일어나는 일에 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60쪽
사람들은 보통 이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일을 이성이 틀렸음을 폭로하는 일과 혼동한다. 우리가 하는 사유 대부분이 냉정한 지성에 의해 차분하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가득 실린 ‘뜨거운’ 과정을 통해 자동적으로 이뤄진다는 심리학의 증거로 무장한 채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성을 사건 이후의 정당화를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깎아내린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 ‘타당한 이성’을 근거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소급적 사유’를 통해 이유를 찾아내는 존재가 된다.
이성을 바라보는 가장 합리적인 관점은 이성을 지나치게 격상시키는 것도 너무 끌어내리는 것도 아니다. 이성은 불완전한 사용자들이 쓰는 불완전한 도구다. 가능한 한 이성적이 되려고 노력하되 믿음의 진실성에 대한 우리의 확신과 그 노력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이 조율 과정에는 확신의 정도에 대한 현실주의적 태도가 필요하다. 수동적이 추종의 대상인 이성은 우리를 진리로 이끌지 못한다.
경험적 진실
66쪽
관념 간의 관계는 수학, 기하학 그리고 순수 논리적 진리와 관련이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대로 이런 진리는 정의상 진리일 뿐 실제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는다. 반면 사실은 순수한 논리만으로는 확립될 수 없다. 이는 또한 사실이 100퍼센트 확실하게 확립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흄은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어떤 사실이건 그 반대의 사실이 존재할 가능성은 여전히 있다. ‘내일 태양이 떠오르지 않으리라’는 명제는 태양이 떠오를 것이라는 확언 못지않게 타당한 명제이며,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반박 가능성 또한 정확히 그 확언 만큼이다.”
예컨대 지구에 거대한 소행성이 떨어질 수 있다고 가정해 보면, 내일 태양이 뜨지 않을 가능성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결국 확실성의 부족은 경험적 진실을 다룰 때 받아들여야 하는 대가의 일부다. 세상에 대해 알 가능성을 확보하고 싶다면 확실성은 단념해야 한다. 절대적 확실성은 수학의 공리나 논리 법칙 등 순순하게 개념적인 문제에 국한된다.
창조적 진실
74쪽
말 때문에 진실이 바뀌듯, 새로운 진실로 인해 말이 바뀌기도 한다. 동성 커플이 결혼할 수 있게 되지 ‘결혼’의 의미가 변화·확장됐고 이는 결혼에 필요한 것들에 대한 새로운 진실을 창출했다. 진실은 늘 창조되고 있으며 좋은 쪽으로건 나쁜 쪽으로건 현실을 변화시킨다. 경제 불평등에 대한 진실은 엄연한 자연적 사실이 아니라 정치적 결정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다. 이미 정해진 일 즉 ‘기정사실(旣定事實, fact on the ground)’은 건설, 폭격, 공공정책에 의해 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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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정사실이라는 용어는 원래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점령 지역에 이스라엘인 정착촌 건설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대중화된 표현으로, 이스라엘은 폭격과 건설을 통해 원주민을 몰아낼 때 이스라엘인들의 팔레스타인 거주를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던 일이라고 주장했다.
77쪽
트럼프 같은 사람들의 ‘악의 없는 과장’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이 실제로는 전혀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는 과장의 목적이 사람들의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것, 무언가 가장 크고 가장 위대하고 가장 화려하다고 믿으려는 사람들의 욕망을 만족시켜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환상을 채워주는 것은 악의 없지도 무해하지도 않다. 트럼프의 <<거래의 기술(The Art of the Deal)>>을 대필한 작가 토니 슈워츠(Tony Schwartz)가 인정한 그대로다. 그는 “기만이란 결코 무고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이제는 악명을 떨치게 된 ‘악의 없는 과장’이라는 구절과 절연했다.
“악의 없는 과장이라는 표현은 형용모순이다. 그것은 그저 ‘거짓말이긴 하지만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라고 말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진실을 창의적으로 날조할 수 있는 다수의 방식을 인식하는 작업을 통해 우리는 미래를 낙관할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된다. 또한 이 작업을 통하면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새로운 진실을 날조하려는 시도에 대응할 도구를 얻을 수 있다.
상대적 진실
80쪽
“에스키모(Eskimo) 사람들의 눈에 관련 단어 이야기는 사실 도시 괴담이다.”
어떤 말이 맞을까? 영리하긴 하지만 현명하다고는 할 수 없는 대답을 하자면 이렇다.
“그것은 ‘진실’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달려 있다.”
이런 얼버무리기 식 답변에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이누이트 족의 눈 관련 어휘는 50개라는 밈은 그 어떤 진실도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라는 관념을 방어하는 데 사용되는 가장 흔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진실을 다루는 한 이론인 ‘대응이론(correspondence theory)’을 생각해보자. 이 대응이론에 따르면 “눈은 하얗다”라는 명제가 참이려면 눈이 실제로 하얀 색이어야 한다. 여기에 ‘상대주의(relativism)’는 ‘눈’과 ‘하얗다’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대응이론이 제공하는 표면상의 단순성과 명확성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다.
83쪽
이누이트의 언어는 포합어(抱合語)로서 다양한 접사들을 거의 무한히 단어에 붙일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다. 이는 하나의 단어에 붙일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다. 이는 하나의 단어로 간주되는 것과 한 단어를 변형시킨 변화형 단어가 늘 분명하게 구분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이누이트의 언어는 단일한 언어가 아니라 밀접하게 연관된 언어들이 모여 구성된 하나의 어족이고 그 때문에라도 일부 작은 변형어들이 서로 다른 단어를 만들어내는지 아니면 동일한 단어의 다양한 버전을 만드는 것인지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단어의 수를 세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상이한 관습 자체가 너무 많아서 결과적으로 각각의 관행에 따라 다른 숫자가 산출된다.
권력적 진실
90쪽
게다가 지식의 이런 진보는 “과학자들은 늘 생각을 바꾼다”라는 부정적 고정관념이 시사하는 바보다 더 온건하게 진행된다. 예컨대 1933년에서 2014년 사이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에서 섭취하는 열량이 각각 어느 정도여야 최적의 균형을 이루는지에 대한 공식적인 권고는 거의 바뀌지 않았다. 그저 단백질 12퍼센트가 10~15퍼센트가 되었고, 지방 27퍼센트는 33퍼센트로 약간 늘어났으며, 탄수화물 61퍼센트는 약간 줄어서 50~55퍼센트가 되었다.
세부적인 내용은 바뀌었지만 제대로 된 음식, 통곡물, 신선한 과일을 많이 섭취하라는 근본적 권고는 수십 년 동안 일관성을 지켜왔다. 회의적 태도보다는 유보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영양과학이 비교적 신생 분야라는 것, 식단상의 권고에 대한 결정판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을 감안해도 지방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온전히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지방 관련 이야기가 복잡한 이유는 증거 이상의 요인, 즉 권력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진실
99쪽
도덕적 판단이라는 것이 행동의 옳고 그름에 대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두 손 들고 판단 자체를 단념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반응은 아니다. 도덕적 사실은 정의와 발견 자체가 어렵다. 사실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관찰과 증거에 호소하면 된다.
그러나 살인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도대체 어떤 경험적 발견으로 입증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실험을 고안해야 살인하면 안 된다는 주장을 검증할 수 있단 말인가? 현미경이나 망원경을 이용한다고 해도 도대체 어디를 겨냥해서 봐야 특정 행동의 도덕적 본질을 찾아낼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인에 반감을 갖고 있으며 살해당한다는 것이 피해자에게 불행한 일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이를 통해 살인이 옳지 않다는 것을 입증할 수는 없다.
103쪽
사실이 변하면 생각뿐 아니라 마음 또한 바뀐다. 도덕적 진보는 대개 이런 식으로 진행되어왔다. 가령 동물 복지에 대한 관심의 증대는 “인간 이외의 존재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인식이 과학적으로 지속 불가능하다는 신념이 증대되면서 이뤄진 일이다. 동성애가 옳지 못하다는 믿음이 약화된 것도 성적 지향은 (일반적으로 최소한) 선택이 아니라는 것, 동성애는 질병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오염 입자나 온실 가스 배출이 잘못된 일이라는 인식이 생긴 것은 이런 물질이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에 전적으로 의존한 변화였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특정한 도덕적 가치가 다른 가치보다 더 낫다고 주장하지 않는 태도가 계몽된 태도이자 진보적이라는 통념은 비뚤어진 것일 뿐 아니라 매우 해롭다. 도덕적 가치는 단순히 다른 ‘가치’나 ‘선호’의 문제가 아니며 ‘취향’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우리의 도덕적 견해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왜곡되거나 편향된 인식은 왜곡되거나 편향된 도덕, 거짓된 믿음, 잘못된 윤리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가 세상을 참되고 바라본다고 해도 완전한 도덕적 합의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
105쪽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된 이론은 지식의 습득뿐 아니라 삶에서 일어나는 행동을 위해서도 극히 소중하다. 참된 이론과 사실이 일치함으로써 이론이 확신을 주고, 그럼으로써 이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그 이론이 제시하는 방향 아래에서 살도록 독려받기 때문이다.”
아무것이나 다 받아들일 수는 없다. 아무거나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은 더욱 그렇다.
총체적 진실
113쪽
진실의 ‘핵심’에 도달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은 바로 이런 까닭에서다. 핵심 따위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의 믿음을 하나로 결속시켜주는 핵심 가닥들이 있을 뿐이다. 타인을 설득하려고 노력할 때 이 점은 인내를 가르쳐주고, 때로는 설득 자체가 불가능하리라는 깨달음을 준다. 누구든 자신에게 익숙한 생각의 그물망이 끊어지지 않도록 진정 애쓰고 있는데 타인이 그 그물망 중 어느 부분이라도 끊어버리려 한다면, 이들은 자신이 지탱하고 있는 허약한 구조물이 실제로는 턱없이 가느다란 실 몇 가닥에 기대어 허공에 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끊어진 부분을 허둥지둥 다시 이어 붙이려고 할 것이다.
그물망의 기초가 ‘믿음’이라면, 그 비유만으로도 자신이 짜놓은 진실의 버전에 갇히게 될 우려스러운 가능성이 제기된다. 슬픈 이야기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생각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 중요한 한 가지 문제에 대한 관점을 바꾸려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개 다른 중요한 의견들 전체도 바꿔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114쪽
예수가 결국 구원자가 아니라거나, 자유무역이 세계의 모든 경제적 폐해에 대한 답이 아니라는 판단을 누군가 내릴 경우, 그는 단지 그 하나의 믿음만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전체, 다시 말해 그것과 관련된 일련의 가치, 심지어 이런 가치를 중심으로 형성된 관계마저 포기해야 한다. 믿음이란 건드리는 즉시 간신히 붙여놓은 직물 전체의 올이 풀려 나가는 실 가닥과 같다. 누군가의 진실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대부분 그의 세계 전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격한 자기검토의 의무에서 면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 뒤돌아서 자신의 그물망을 정직한 태도로 살피면서, 어느 부분이 탄탄하고 어느 부분에 지지대가 부족하며 어느 부분의 올이 촘촘하게 짜여 있는지, 어느 부분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이런 방식을 통해 우리는 세계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차근차근 교정해날 수 있다. 지나치게 비관하는 것도, 그물망의 비유에 갇혀 자신의 믿음이 생각보다 유연성이 떨어진다고 단념하는 것도 금물이다.
결론
119쪽
탈진실의 세계에서 이런 인식의 미덕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고, 미덕이 사라지는 만큼 악덕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과도한 확신, 냉소주의, 폐쇄적 태도, 끝 모를 개인주의, 권력을 향한 굴종, 더 나은 진실을 구축할 가능성에 대한 불신, 머리와 분리된 직감이 추동하는 도독 등이 이런 악덕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진실의 세계에서 우리가 느끼는 그나마 가장 큰 위안은 인식의 미덕을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악덕을 대놓고 수용하는 상황까지는 벌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영국의 철학자 버나드 윌리엄스(Bernard Williams)가 밝혔던 진실의 두 가지 핵심적 미덕, 즉 ‘진정성(sincerity)’과 ‘정확성(accuracy)’을 아직도 소중히 여긴다. 이 두 가지 미덕은 진실이 그것을 추구하는 자와 세계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요구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실을 올바르게 확립하기 위해서는 사실을 대하는 ‘태도’부터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120~121쪽
모든 구성인자들이 서로 연관을 맺는 유기적이고 총체적인 체계다. 이 정원의 일부 요소들은 영구적이거나 불변의 것인 반면, 다른 것들은 성장하거나 변하거나 소멸된다. 또한 진실은 정원처럼 정성스레 돌봐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화와 왜곡과 오해와 거짓말이라는 온갖 잡초가 정원을 뒤덮어버리고 만다.
진실은 복잡하지만, 앞서 살펴본 열 가지 유형의 진실 각각으로부터 비교적 간단한 지침을 뽑아낸다면 진실을 꽃피우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1. 종교적 진실은 세속적 진실과 경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별개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2. 생각은 ‘혼자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하는 것이다.
3. 필요한 것은 ‘회의적’ 태도이지 냉소가 아니다.
4. 이성은 확신이 아니라 ‘겸손’을 요구한다.
5. 똑똑해지려면 우선적으로 자신의 ‘어리석음’부터 인식해야 한다.
6. 진실은 발견뿐 아니라 ‘창조’의 대상이기도 하다.
7. 대안적 견해는 대안적 진실이 아니라 진실을 ‘풍성하게’ 해줄 뿐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8. 권력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진실이 ‘권력을 향해’ 말해야 한다.
9. 더 나은 도덕성에는 더 나은 ‘지식’이 필요하다.
10. 진실의 인식은 ‘총체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거짓 진실을 방어하는 일은 대체로 우리를 분열시키는 특정 진실을 옹호하는 전투의 형식을 띤다. 전투도 때로는 필요한 형식이지만 군사적 비유가 암시하듯 전투는 반목을 악화시킨다.
더 넓고 통합적인 목표는 우리가 진실을 대할 때 공유하는 가치, 우리를 진실로 이끄는 미덕, 우리가 진실을 밝히도록 도와주는 원리를 방어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같은 방어를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서는 이들은 활짝 열린 문간에서 일을 추진한다. 궁극적으로 진실이란 철학적 사변이나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