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주의(녹색주의)

'서평 및 발제문'에 해당되는 글 16건

  1. 2010.08.27 착한 사람이 오히려 더 위험하다(?)
  2. 2009.02.11 혁명을 혁명하라!
  3. 2009.02.10 세계화, 재앙인가 축복인가?
  4. 2009.02.09 직장인 장일순
  5. 2009.02.08 플러그를 꼽는 사람들 1
  6. 2009.02.08 거꾸로 은행

착한 사람이 오히려 더 위험하다(?)

-내추럴리 데인저러스를 읽고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범위에서 나쁜 사람은 착한 사람보다 더 위험하다. 그런데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착한 사람이 나쁜 사람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물론이다. 착한 사람의 모든 행동이 착한 것이 아니듯 당연히 나쁜 사람의 모든 행동이 나쁜 것도 아니다. 때로는 착한 사람이 나쁜 행동을 하기도 하고, 나쁜 사람이 착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세상은 생물학적인 범위에서 자연 물질과 인공 물질로 구별할 수 있지만 화학적인 범위에서는 모두 분자로 이루어진 화학 물질일 뿐이다. 물리학적 범위에서는 간단히 말해 세상의 모든 물질은 핵과 전자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화학 물질은 자연적으로 존재하며, 일부의 물질만이 인공적으로만 만들어진다.

  인간은 수십만 년 동안 지구에 살아오면서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자연적인 화학 물질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게 진화하였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자연적으로 잘 만들어지지 않거나 인공적으로만 만들 수 있는 미량의 물질이 만일 인류 초창기,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인 생명체의 탄생 초창기에 지구 환경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다면 인류에게 지금의 자연 물질은 대부분 독이 되었을 것이고, 인류는 지금의 인공 화학 물질이라는 환경에 의존해 삶을 영위했을 것이다.

  모든 물질은 그 양에 따라서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자연 상태에서 우리가 흔히 또는 많이 접하는 것들은 인체에 해가 되기보다는 득이 되는 것이다. 가끔 또는 적게 접하는 것은 약이 되거나 독이 되는데, 보통은 적을 때 약이 되지만 많을 때에는 독이 된다. 그런데 우리가 자연 상태에서 아주 적거나 드물게 접하는 물질이나 존재하지 않는 물질을 합성해 자연 상태보다 수십만 배까지 접할 수 있게 만든다면 이는 일반적으로 약이 되기보다는 독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판단하기 쉽게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은 모두 몸에 좋고 인공적으로 합성한 물질은 몸에 나쁘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이러한 흑백논리를 지적하는 것은 올바른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오히려 득이 될 수도 있지만 생태계를 교란시킬 수 있는 DDT를 옹호하거나 자연 상태에서 우리 몸에서도 항상 방사능을 만들고 또 쐬고 있다고 원자력이 안전하고 청정한 에너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연은 인간에게 안전하지만도 위험하지만도 않을뿐더러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그런 자연 속에서 자연의 일부인 우리 인간은 그 변화에 맞춰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해 적응해가고 있는 존재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순간의 편리와 풍요를 위해 우리는 우리 몸이 적응해 나갈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자연을 변형시키고 교란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해서 인공적으로 만든 물질에 점점 더 의존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 물질인 음식물로 섭취하는 비타민은 보통은 구성 성분 중의 아주 일부로 과다 섭취로 죽을 정도로 섭취하려면 아마도 그 전에 배가 터져 죽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인공적으로 자연에서 축출해 농축하거나 합성해 만든 것을 한 숟가락 먹는다면 어쩌다 약이, 그러나 그보다는 독이 될 것이다.

  인간에게서 뱀이나 독버섯 등과 같이 대부분의 동물들은 자신에게 위험한 것들은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인공적인 것들은 진화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대부분 정보가 축척되지 않아 감각적으로 위험성을 감지하기 어려워 쉽게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우리가 이루어낸 현재의 풍요에는 인공 합성 물질의 역할이 주요했기에 자연 물질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만큼이나 인공 합성 물질에 대한 맹목적인 불신 역시 위험하다. 우리에게 진정 위험한 것은 나쁜 사람은 항상 나쁘고 착한 사람은 항상 착하다는 흑백 논리를 가지는 것처럼 자연 물질도 인공 합성 물질도 아닌 이분법적인 사고방식과 맹목적인 믿음이다.

혁명을 혁명하라!


-피터 칼버트의 ‘혁명’을 읽고


  혁명은 우리에게 어떤 것일까? 어떤 사람에게는 염원의 대상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위험성과 기대감이 뒤섞인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단지 불순한 대상일 것이다. 현실에 불만족이 누적될 대로 누적된 계층은 급격한 사회 체제의 변화를 통해 불만족이 해결되기를 원하지만 현실에 만족한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 받는 어떠한 변화, 비록 점진적인 변화라 할지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할 것이다. 어쨌든 사람들에게 아니 적어도 내게 혁명은 가슴을 뛰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존재이다.

  역사가는 역사를 기록함에 있어서 완전한 객관성을 가질 수는 없어도 확보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역사의 분석은 단지 학문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고 우리의 삶의 변화에 연관을 갖듯이 혁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회적 현상을 언어로 규정한다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있다. 특히 일상적이지 않고 매우 특별한 경우에 드물게 발생하는 현상이라면 새로운 외연의 발생에 따라 수시로 그 내포가 변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객관적 입장을 견지하려고 해도 거기에는 혁명을 규정하려는 사람들의 염원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은 우리나라의 동학혁명이나 4.19혁명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리고 어떤 사회 현상을 갖고 우리는 혁명이다 항쟁이다 운동이다 쿠데타다 내전이다 서로 다른 의견을 갖기도 한다. 또한 우리는 농업혁명이다 디지털혁명이다 문화혁명이다 사회적 사건이 아닌 다른 변화에도 혁명이라는 말을 붙이길 좋아한다. 그런 면에서 확실히 사람들은 혁명을 긍정적 방향으로의 변화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성공했든 실패했든, 위로부터이든 아래로부터이든, 엘리트들에 의해 주도되었든 민초들에 의해 주도되었든, 특권층에게 권력이 이양되었든 민중들에게 권력이 이양되었든, 체제의 변화가 어느 정도이든 혁명은 현존하는 사회 체제의 문제점이 누적되어 더 이상 어느 세력들의 불만을 해결할 수 없을 때 발생하는 것임을 틀림없는 것 같다. 어떤 역사적 사건을 혁명이라고 부르기를 고집하고 또, 혁명이라고 부를 만한 어떤 변화를 염원하는 것이 바로 그 시기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혁명이다.

  혁명은 매어 있지 않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열망하는 것이다. 피터 칼버트와 같은 학자들의 분석이나 정의에 있지 않다. 그들의 연구에 의해 정의된 혁명은 혁명되어져야 한다. 그들이 정의한 혁명은 단지 우리들의 열망과 행동을 통해 구체화될 수 있을 뿐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혁명을 이루어야 한다. 비폭력의 평화적 혁명, 모든 생명체가 존중받는 혁명,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껴안는 혁명, 모두가 조화롭게 함께하는 혁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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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31일 책읽기모임 발제문입니다. ^^



세계화, 재앙인가 축복인가?


-'세계화와 그 적들' 발제문


세계화란 무엇일까?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우리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점점 더 많은 사람들과의 정보 교류와 상품의 교역을 제공한다. 이러한 교류와 교역의 범위가 마을 내에서 다른 마을로, 다른 지역으로, 더 나아가 다른 나라로 확대되는 것이 순수한 의미의 세계화라고 할 수 있다.

세계화로 인한 교류와 교역의 확대는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적으로 의도하지 않은 구조적 변화를 때에 따라서는 폭력적으로 수반한다. 다니엘 코엔의 말을 빌리면 ‘세계화의 주된 역설은 세계화의 과정이 너무 빠르거나 너무 폭력적이라는 데 있지 않다. 기술의 진보를 확산시킬 수 있는 자본주의 능력이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자본주의 경향보다도 더 미약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글을 인용해 서구 기술 세계가 가진 퇴폐적인 부작용에 대한 면역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계급 착취나 종교간 착취의 형태처럼 나타나 보인다고 한다. 그 예로 스페인에 점령당한 잉카 문명의 멸망과 식민지 하의 인도 방직 산업과 식민지 독립 후의 아프리카 가나와 탄자니아의 경제 몰락이라고 한다. 일본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의 경제 부흥은 내부 역량 강화로 면역력을 키운 성공적인 사례로 설명한다.

또한 다니엘 코엔은 거리의 역설을 예로 들어 ‘운송 비용의 절감은 경제 활동을 공간적으로 분산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구와 부를 밀집시킨다’고 한다. 도시화는 세계화의 필연적인 결과물의 하나이며, 세계화의 결과로 개인 간, 지역 간, 국가 간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된다고 한다. 그럼, 이렇게 불평등한 형태로 나타나는 세계화는 과연 필요한 것이며, 막을 수 없는 것인지, 또한 폭력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와해시킬 수는 없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세계화 특히, 경제의 세계화를 주장하는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세계화가 성장을 통해 세계를 빈곤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것이다. 빈곤의 가장 큰 원인인 질병과 기아 두 가지 문제를 예를 들어 세계화가 재앙인지 축복인지 생각해 보자.

1930년대 알제리의 오레스 주변 사회는 빈곤하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균형 잡힌 행복한 사회였다. 프랑스인들은 이 지역의 빈곤을 해결하고자 DDT 같은 살충제를 마구 뿌리고 인근 지역과 연결하는 도로를 건설하였다. 결과적으로 디푸스와 말라리아를 박멸함으로써 유아 사망률은 급격히 감소하여 한 세대 동안 인구가 두 배로 증가하였다. 부양 인구가 늘어나 가축 수를 늘림으로써 토양은 척박해졌고, 잉여 생산물은 인근 지역에 수출하여 일부는 부유해졌지만 많은 사람들은 빚에 허덕이는 불평등 구조가 되고 기존의 전통적 가치가 붕괴되었다. 결국 20년도 지나지 않아 오레스 주변 사회는 빈민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모스 H. 홀리는 그의 책 ‘인간생태학’에서 다수확 품종의 벼는 제3세계를 쌀 수입국에서 쌀 수출국으로 성공적으로 변환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관개 시설의 확충, 도구 구입, 자본 투자 등 농장 규모를 확대시켜 소규모 농장들이 사라져 실업률이 높아지게 되었으며, 생산성 증가로 쌀값을 하락시켰고 싼 쌀값은 재래종 쌀에 대한 소비자의 선호를 타파시켰다고 한다.

다니엘 코엔은 세계화의 문제점을 식민지를 가진 나라보다 식민지를 가지지 않은 나라가 더 경제 성장률이 높고 보호 무역을 하는 나라보다 하지 않는 나라가 더 경제 성장률이 높다는 등의 예를 통해 세계화의 문제가 선진국이나 계급에 의한 착취라든가 기독교와 이슬람의 종교 갈등으로 인한 문명의 착취가 아니라 선진국이나 지배 계급과 같은 풍요를 누릴 것이란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한 문제와 불평등함에도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로 된 소외의 문제로 보고 있다.

경제적인 면에서 세계화는 총량적으로 엄청난 부를 세계에 안겨 주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질병과 기아로 인한 유아 사망률의 감소는 물론 평균 사망 연령의 증가는 세계화의 혜택이다. 그러나 또한 폭발적인 인구의 증가와 빈부 격차(의도적으로는 저자의 주장대로 착취라고 볼 수 없으나 구조적으로는 착취다)로 인한 소외감과 전통적 가치의 파괴를 안겨 준 것 역시 세계화의 혜택(?)이다. 다니엘 코엔은 이 모든 혜택 자체가 세계화의 결과가 아니라 세계화 자체라고 말한다.

다니엘 코엔의 관점에서는 능동적으로든 수동적으로든 세계가 세계화되는 것을 반대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 양면적 가치를 지닌 세계화에 대해 다니엘 코엔은 국가 간의 문제는 경제 발전에 성공한 나라의 예를 들어 독재적이건 자율적이건 면역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연히 변화는 변화를 요구한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의 세계화는 변화는 폭력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으며, 급격히 진행되고 면역력을 갖출 내부 역량이 부족할수록 부정적인 결과를 심화시킨다. 작게는 마을 간 크게는 국가 간의 의도하지 않은 빈부 격차의 심화라는 세계화의 병폐를 줄이기 위해서는 면역력을 길러주는 내부 구조의 변화가 필요하며 구조적 피해자를 위해서는 의도적 정책이 필요하다.

그러나 세계화가 양면성을 가졌다는 다니엘 코엔의 주장은 세계화를 상품의 교역을 중심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이다. 세계화가 정보의 교류를 중심으로 자급자족의 소규모 공동체 사회 위주로 된다면 다니엘 코엔이 주장하는 세계화 그 자체가 발생하는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 세계화를 단지 성장 위주 관점에서 본다면 인구와 부를 밀집시킬 수밖에 없으며, 결과적으로 빈부 격차의 심화와 각종 환경 파괴로 이어지고 말 것이다. 지속 가능하고 소외되지 않는 평등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상품의 세계화가 아니라 정보의 세계화를 지향하여야 한다. 상품의 교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화가 아니라 정보의 교류를 통해 지역 기반의 자급자족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진정한 세계화이며 세계화가 더 이상 재앙이 아닌 축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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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6~17일 책읽기모임 발제문입니다. ^^


직장인 장일순

- '좁쌀 한알' 발제문


‘좁쌀 한알’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지금 사회에서 평범한 생활을 하는 직장인이 무위당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있는가이다. 바로 당신이 무위당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아니, 무위당이 지금의 당신과 같은 환경 속에서도 무위당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이다.

나는 한 마디로 불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무위당이 물려받은 재산도 별로 없고 특별한 재주도 없고 교육도 특별히 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일하지 않으면 가족이 모두 당장 끼니를 굶어야 할 처지라면 무위당이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

특별한 재주도, 물려받은 재산도, 지식도, 인맥도 없는 무위당은 먹고 살기 위해서는 결국 평범한 직장을 구해야 한다. 그가 속한 집단의 이익이 다른 집단의 손해에 의한 것이고, 다른 집단의 이익이 그가 속한 집단의 손해를 의미하는 경제 활동 속에 속해 있을 수밖에 없는 무위당은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대인의 생활이란 모든 게 분리되어 있어서 어느 한 부분이 모든 부분을 의미하는 농경생활과는 분명 거리가 있다.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는 가족과 이웃과 농사 등 모든 관계 분리되지 않고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농사일이 가족의 일이며 이웃의 일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사회는 모든 것이 분리되어 있다. 가족, 이웃(취미 모임 등), 일이 분리되어 있어서 일에 열중하면 가족에 소홀해지고 가족에 열중하면 이웃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도 물론 자신을 낮출 수는 있을 것이다. 친구들이나 어린이 앞에서도 당장 땅바닥에 엎드려 절할 수 있고, 오지랖 넓게 여기 저기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줄 사람을 찾아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까지일까. 며칠을 집을 직장을 비우고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있나 알아보러 다닐 수 있을까? 누군가 자신을 찔렀을 때 칼을 닦아주며, 찌르느냐고 수고 많았다고 위로해 줄 수 있을까? 아니 가족을 위해서라도 찔리기 전에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찔린 후에도 살아나려고 발버둥 쳐야 하지 않을까.

직장인 장일순이라면 이 시대에 어떤 고민을 하며 어떻게 살아갔을까. 나는 직장인 장일순이 무척 궁금하다. 내가 고민하고 살아가는 것과 어떻게 다를 것인가가 궁금하다. 분명 무위당은 존경받아 마땅한 이 시대의 선생님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벽을 느낀다. 평범한 집안과 평범한 능력을 갖고 이 시대의 훌륭한 인격체로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이미 무위당이 보여준 것을 무지한 내가 알아채지 못한 것일까? 완전해 보이는 인격만이 완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진정한 개혁은 실천에서부터 정책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분리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서로 모순되는 모든 것을 실천할 수 없다. 불완전한 실천으로 우리는 완전한 사회를 만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무위당의 반만이라도 닮으려고 노력한다면 분명 우리는 모순된 현실을 개혁할 수 있지 않을까? 실천이 없으면 아무 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 완전한 하나의 실천이 아니라 불완전한 실천들이 모여 완전한 개혁을 이루는 것이라 나는 믿는다. 인격은 실천이며, 불완전한 것들로 이루어진 완전함이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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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 18일 책읽기모임 발제문입니다. ^^



플러그를 꼽는 사람들


- '플러그를 뽑는 사람들' 발제글


모든 사회가 아미쉬 공동체와 같은 공동체 사회가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는 아미쉬 공동체는 지금과 같은 물질 문명의 사회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지금의 문명 안에서 보장된 하나의 탈출구는 될 수 있을지언정 미래 사회의 대안은 될 수 없다고 본다.

우선 근본적인 생태 관점에서 농업 역시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이며, 농업이 인간을 굶주림으로부터 해방시키기보다는 인간을 노동의 노예로 만들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수렵채취 시기 인간은 하루 4시간의 노동력으로 먹을 것을 해결했으며, 남는 시간을 지루하게 보내지 않기 위해 예술이 발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인류의 수가 자연이 주는 대로 먹고 살 정도로 충분히 적었기에 가능했던 시기이다.

농사는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하고 또 많은 아이를 먹이기 위해 땅을 개간해야 하는 생태파괴적 악순환이 되풀이 된다고 한다. 생태적인 관점에서 인간이 노동 집약적인 농사를 통해 공동체 사회를 유지하는 것보다는 한 사람 한 사람 각각이나 가족 단위의 소집단이 이동하며, 자연을 인공적으로 개간하지 않고 주어진 환경 내에서 먹을 것을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만일 아미쉬 공동체처럼 물질 문명의 기본인 전기를 사용하는 제품을 거부한다면 전기나 환경 파괴적인 에너지를 통해 만들어진 물건 역시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단지 현재의 물질 문명 안에서 자신들이 필요로 하고 선택한 친환경적(발재봉틀 등) 제품이나 마차 등의 친환경적 교통 수단을 사용한다고 해서 물질 문명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마차의 발명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지도 않고 더 문명화 된 교통 수단을 이용하지 않는 것은, 완전한 바느질이 아니라 발재봉틀을 이용하는 것은, 적당한 타협점을 찾는 것으로 어찌 보면 기회주의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들 수위의 문명 공동체 사회는 커다란 자연 재해를 받는 지역이 아닌 곳이기에, 국가가 그들의 사회를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닐까.

다양성을 지향하는 생태적 관점에서도 모든 사회가 아미쉬 같은 가족 제도나 공동체처럼 획일화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되며 공동체만 존재해서도 안 된다. 또한 인간의 다양한 창의성과 지적 호기심도 금지해서도 안 된다. 자신의 다양한 창의성을 바탕으로 한 예술성이 보장되듯이 과학이나 수학은 물론 인류학 등에 대한 지적인 탐구도 보장되어야 한다.

지금 세계는 달을 왕복할 수도 있으며 지구를 5개나 필요로 하는 미국 같은 나라가 있는가 하면 환경의 변화가 없는 곳에서는 아직도 구석기적인 삶을 살아가는 종족도 있다. 그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서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문명이란 어떤 것일까. 어느 것이 더 생태적인 삶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 모든 생명은 어느 한 순간에 머물러 있는 존재는 아닐 것이다. 모든 생명은 다양한 환경 변화에 적응하고 살아 남으려는 역동적인 존재인 것이다.

만일 아미쉬 공동체의 기회주의적(?) 방식이 아니라 양극단 즉, 생활방식은 수렵채취의 구석기적이면서도 첨단 과학을 이용할 줄 안다면, 인류는 가장 생태적이면서도 어떤 환경의 변화(빙하기나 운석 충돌 등)에도 계속 지구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인류가 물질 문명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발전시켜야 하는 이유는 인류가 종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이다. 물질 문명의 발전이 거꾸로 우리 생존을 위협하게 해서도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다시 플러그를 꼽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을 회복 불가능하게 파괴하면서까지 우리의 편리를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의 자정 능력 안에서 문명을 추구하며, 앞으로 다가올, 다가올지도 모르는 자연의 재앙으로부터 우리의 생존을 지켜나가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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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22일 책읽기모임 발제문입니다. ^^


거꾸로 은행


-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발제문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된다. 지금의 사회가 제대로 된 사회라면 그라민 은행은 그야말로 거꾸로 가는 은행이다. 그런데 만약 지금의 사회가 거꾸로 가는 사회라면 그라민 은행이야 말로 제대로 된 은행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란 개인의 노력보다는 사회적 구조에 의해 창출된다. 그 구조를 잘못 이용하게 된다면 자신의 노력(노동의 질과 시간)에 비해 수십 배에서 수백 배의 가치를 얻게 된다. 그것을 제로섬의 경제학에서 본다면 그만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노력의 가치에서 그만큼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노력 이상으로 얻은 가치는 사회적 구조에 의해 얻은 것이므로 당연히 사회에 환원해야 하나 지금의 사회는 오히려 개인의 자유 신장이라며 부당한 가치의 축척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거기다 부자들은 이렇게 얻은 부를 이용해 더 많은 부를 얻으려고 한다. 그것은 갖가지 착취 행위로 나타나게 된다.

  돈을 가진 사람들이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고리대금업이다. 당장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음식이나 의료 서비스 그리고 생필품을 구할 돈도 돈을 빌릴 곳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약점을 이용한 고리대금업은 가난을 더욱 가난 속으로 몰고 간다. 그래야 부자는 더 부자가 될 수 있으니까.

  은행에서조차 이렇게 무일푼의 가난한 사람들은 소외의 대상이며, 은행은 덜 가난한 사람들의 예금과 세금으로 부자들을 더 부자로 만들기 위해 안달이 난 것 같아 보인다. 왜 사회적 구조를 잘못 이용하려는 부도덕한 사람들을 은행은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믿는 것일까? 은행은 담보가 신용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담보가 곧 신용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부자들의 담보가 부도덕한 부의 축척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부도덕이 신용보다 중요하거나 부도덕이 곧 신용이라는 말인가?

  이러한 의미에서 그라민 은행은 자립할 의지와 계획이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립할 수 있는 최소한, 대출 가능한 최대한 지원해 주는 맨발로 뛰는 가난 구제 사업가라고 할 수 있다. 우습게도 우리가 그라민 은행을 칭찬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가난 구제 사업이 사회가 거꾸로 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라민 은행의 이러한 현실 안에 있기에 한계를 가지고 있다. 제로섬의 경제 안에서 극빈층의 자립을 대상으로 하는 비주류 경제 활동이라는 점이다. 자본가들이 극빈층의 자립 경제 활동이 자신들의 이익에 크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과연 그라민 은행이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 또한 아무리 가난한 사람들을 제대로 도운다고 해도 가난이 계속 재생산되는 사회에서는 2차적인 방법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근본적으로 가난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거꾸로 가는 사회에서 거꾸로 된 은행을 계속 만들고 확장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가는 사회를 거꾸로 돌리는 일이다. 어찌 되었건 그라민 은행이 단지 경제학이 대학 연구실에 머물러 있지 않고 행동하는 지식의 산물이라는 점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과 희망을 줬다는 점에 대해 우리는 유누스 총재에게 찬사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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