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주의(녹색주의)


내가 꿈꾸는 초록 세상

- 예전에 썼던 글 블로그에 올리기 위해 다시 ^^;


  어머니는 외할머니를 미워하셨다. 외할머니가 장남인 외삼촌 대신 장녀인 어머니를 어려서부터 동네 품앗이에 내보냈기 때문이다. 다른 집에서는 어른들이 나와 어른들과 맞춰 일을 하려니 힘들기도 하고, 친구들과 놀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품앗이는 현대 사회의 관점에서는 확실히 불합리하다. 요즘은 농촌에서도 이웃끼리 여자는 일당 3만원 남자는 4~5만원에 일을 해준다. 농사짓는 땅이 크면 당연히 품삯도 많이 들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린이들은 노동법 상으로도 어림없는 일이다. 그런데 고만고만하기는 해도 땅 크기가 어쨌든(물론 땅이 크면 새참을 더 풍족히 내놓기는 하지만), 어린이건 노인이건 관계없이, 한 집에 한 명씩 서로 농사일을 도와주는 것은 땅이 적은 사람들이나 젊고 일을 잘하는 사람들에게는 손해 보는 일이다. 그런 어리석은 일에 순응하다니.

  지금 같은 경쟁 사회에서는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고 상대방이 손해를 봐야지 내가 손해를 볼 수 없는 법인데 나는 사람들에게 제발 손해 보는 마음으로 살자고 한다. 손해를 감수하는 베푸는 마음으로는 돈이 없어도 살 수는 있지만 정이 없이 살 수는 없다. 그런 세상을 꿈꾸는 것은 단지 나 같은 몇 사람뿐일까?


  나는 혼자 떠나는 여행을 좋아했다. 특히, 기차 여행을 좋아했다. 그래서 기차가 다니는 곳은 지금은 사라진  비둘기호를 타고 대부분 여행을 했다.

  그날도 기차를 타고 탄광촌들이 모여 있는 조그만 역에 내려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땅거미가 져 가는 저녁 무렵이었는데, 시끌벅적한 소리가 나서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은 전형적인 탄광촌인 열촌으로 가운데 길이 있고 양쪽으로 집이 네다섯 채씩 있었다. 보통 집 한 채에 방 한 칸, 부엌 한 칸이 두 개씩 붙어 있으니까 열여섯에서 스무 가구 정도가 사는 것 같았다.

  나는 처음엔 마을 잔치라도 벌어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길 가운데 삼삼오오 이웃들이 모여 앉아 고기를 굽기도 하고, 술을 따르기도 하면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 주위를 돌아다니며 저녁보다는 노는 데 더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것은 마을이기보다는 한 가정이었다. 대가족이 아닌 대가족.

  그들이 같은 탄광에서 서로 의지하며 일하기에 어느 마을보다 유대감이 돈독해서 그런 식사를 할 수 있었겠지만 내게 그 모습은 잊을 수 없는 유토피아였다. 그런데 지구라는 운명공동체에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몇 년 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지가 있는 시골에 갔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그 깜짝 놀랄 일은 오직 나에게만 일어난 것이었다. 시골 마을 사람들은 물론 도시에서 내려간 친척 어른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던 내가 아직도 색안경을 끼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마을 어른들은 상여 맨 앞에 깃발을 두 장애인에게 맡겼는데, 한 명은 젊고 한 명은 노인인 다운증후군 장애인이었다. 마을에 사람들이 없어서일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도시에서는 가능한 일일까? 도시에서는 노인들이 딱히 할 만한 일이 없지만 시골에서는 일손이 부족한 관계로 노인들은 물론 다운증후군 장애인들도 빈둥거려서는 안 된다!? 나중에 시골에 다시 내려가서 안 일이지만 중년의 다운증후군 여인도 있었는데 밭일을 하고 오는지 호미를 들고 마을로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젊었거나 늙었거나, 여자이거나 남자이거나, 장애가 있거나 없거나, 일손이 부족해서건 심심풀이건 모두가 비슷비슷한 일을 하고 차별 받지 않고 소외되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 바로 내 눈 앞에 있었다.


  지금 도시 사람들은 대부분 아파트 생활을 하고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이라고 하더라도 부엌이 아니라 주방인 관계로 뜨거운 물을 마당에 버릴 일이 없다. 아니 원래 버리지 않았다. 뜨거운 물은 식은 후에야 마당에 버렸다. 지렁이들이 죽지 않게 우리 할머니들은 그렇게 살았다.

  작년 가을에 채식 모임에서 농활을 갔는데 싱가포르채식주의자협회 회장이 참석했다. 그때 함께 시골길을 산책하다가 문득 내 눈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나는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 통역을 부탁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겨울에 날짐승들이 굶어죽지 말라고 까치밥을 남겨둔다고...


  그래, 나는 단지 꿈꾸고 있는 것이야. 어머니 세대는 물론 얼마 전까지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이런 일들은 단지 꿈일 뿐이야. 그게 단지 꿈일 뿐인데 왜 나는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지?


200만원짜리 자원봉사


- 태안 기름 유출 사고 때 채식과 건강 신문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풍덩’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이미 배낭은 열려 있었고 200만원 상당의 카메라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가의도 기름 제거 활동을 끝내고 어선에서 유람선으로 갈아타며 뛰어오르는 순간 충격에 조금 열려 있던 지퍼가 벌어지며 카메라가 수장되고 만 것이다. 기념으로 기름 절은 흡착포와 고무장갑을 가져가겠다고 배낭에 넣었던 사소한 욕심과 꽉 찬 배낭의 지퍼를 끝까지 채우지 않은 사소한 부주의가 불러일으킨 사고였다. 사소한 원인은 결코 사소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다. 유조선‘허베이 스프리트'호와 바지선의 충돌로 일어난 기름 유출 사건처럼.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위로하듯 200만 원짜리 봉사였다고 사람들에게 말했지만 그보다는 200만 원짜리 교훈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나로서야 카메라를 잃고서야 사소한 일이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지만 적어도 수천억 원의 피해가 발생한 기름 유출 사건을 통해 우리는 과연 그만큼 절실히 깨닫는 것이 있는 것일까.

지난번 만리포에서 회원들과 기름 제거 활동을 했을 때는 몸이 약한 줄 알면서도 참여한 회원도 있었다. 평소 환경과 관련된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회원이라 기름 제거 활동을 외면할 수 없었지만 그 때문에 며칠을 앓고 병원 신세까지 졌다고 한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뿐이다. 만리포로 기름 제거하러 갔을 때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가의도에는 안흥 주민을 포함 백여 명이 기름 제거 활동을 했다. 연인원 수십만 명이 동원되었다고 하지만 섬 지역은 기름 제거 활동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가의도 해안가는 마치 문신을 새긴 것처럼 기름이 해안가 돌들과 모래 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심하게 기름 냄새가 났지만 우리 팀들은 밀물이 몰려들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제거하려고 점심을 미뤄가며 기름을 제거하려 애썼다. 그러나 몇 시간의 작업으로는 일한 티만 낼 수 있었고 우리는 밀물에 도망치듯 쫓겨 날 수밖에 없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잃어버린 카메라보다도 기름을 제대로 제거하지 못한 마음은 검은 기름이 가슴에 스며드는 듯 무겁기만 했다.

이번 기름 유출 사건으로 녹색연합을 비롯한 환경단체들이 송년회를 취소해 가며 기름 제거 활동에 발 벗고 나섰지만 월드컵 때 보여 주었던 모습과 비교한다면 오히려 대조적인 모습이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매스컴에서는 세계가 놀랄 만큼 자원봉사 참여가 높다고 떠들고 있지만 동원된 군과 공무원을 제외한다면, 몇 번씩 참여한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과연 몇 명이 참여했을까. 우리 대부분은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즐기기에 더 바쁘지 않았는가. 자신의 생활에 직접 부딪히는 문제가 아니라면, 즐기는 일이 아니라 어려움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면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외면하려 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실 자신의 몸만 챙긴다고 해서 결코 건강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임에도.

자신이 아무리 건강하게 살려고 노력해도 우리 삶의 터전인 산과 바다 등 자연환경이 오염되었다면 결코 건강할 수 없다는 것을, 이 땅에서 우리는 결코 자신의 문제가 아닌 것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아직도 깨닫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삶의 방식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겨우(?) 1만여 톤 유출된 기름의 독성 때문에 우리는 난리를 치고 있지만 인류는 편리와 물질적 풍요를 위해 그런 기름을 더 독하게나 덜 독하게 정제해 바다는 물론 땅과 강, 공기 중에 심지어 음식물로 1년에 310억 배럴(약 5조 리터)을 유출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만일 이번 사건이 기름이 아니라 핵 원료였다면 어땠을까. 체르노빌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상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끔찍한 재앙이 일어났을 것이다. 제2, 제3의 기름 유출은 물론 더 큰 환경 재앙은 우리가 석유나 원자력 등 반환경적인 산업에 의지하는 한 아주 사소한 잘못에서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자연을 파괴하는 개발과 성장을 통해 이룩한 편리성과 물질적 풍요는 그 혜택이 클수록 그 이상의 피해를 줄 수 있는 위험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는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착한 사람이 오히려 더 위험하다(?)

-내추럴리 데인저러스를 읽고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범위에서 나쁜 사람은 착한 사람보다 더 위험하다. 그런데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착한 사람이 나쁜 사람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물론이다. 착한 사람의 모든 행동이 착한 것이 아니듯 당연히 나쁜 사람의 모든 행동이 나쁜 것도 아니다. 때로는 착한 사람이 나쁜 행동을 하기도 하고, 나쁜 사람이 착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세상은 생물학적인 범위에서 자연 물질과 인공 물질로 구별할 수 있지만 화학적인 범위에서는 모두 분자로 이루어진 화학 물질일 뿐이다. 물리학적 범위에서는 간단히 말해 세상의 모든 물질은 핵과 전자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화학 물질은 자연적으로 존재하며, 일부의 물질만이 인공적으로만 만들어진다.

  인간은 수십만 년 동안 지구에 살아오면서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자연적인 화학 물질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게 진화하였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자연적으로 잘 만들어지지 않거나 인공적으로만 만들 수 있는 미량의 물질이 만일 인류 초창기,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인 생명체의 탄생 초창기에 지구 환경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다면 인류에게 지금의 자연 물질은 대부분 독이 되었을 것이고, 인류는 지금의 인공 화학 물질이라는 환경에 의존해 삶을 영위했을 것이다.

  모든 물질은 그 양에 따라서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자연 상태에서 우리가 흔히 또는 많이 접하는 것들은 인체에 해가 되기보다는 득이 되는 것이다. 가끔 또는 적게 접하는 것은 약이 되거나 독이 되는데, 보통은 적을 때 약이 되지만 많을 때에는 독이 된다. 그런데 우리가 자연 상태에서 아주 적거나 드물게 접하는 물질이나 존재하지 않는 물질을 합성해 자연 상태보다 수십만 배까지 접할 수 있게 만든다면 이는 일반적으로 약이 되기보다는 독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판단하기 쉽게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은 모두 몸에 좋고 인공적으로 합성한 물질은 몸에 나쁘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이러한 흑백논리를 지적하는 것은 올바른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오히려 득이 될 수도 있지만 생태계를 교란시킬 수 있는 DDT를 옹호하거나 자연 상태에서 우리 몸에서도 항상 방사능을 만들고 또 쐬고 있다고 원자력이 안전하고 청정한 에너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연은 인간에게 안전하지만도 위험하지만도 않을뿐더러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그런 자연 속에서 자연의 일부인 우리 인간은 그 변화에 맞춰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해 적응해가고 있는 존재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순간의 편리와 풍요를 위해 우리는 우리 몸이 적응해 나갈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자연을 변형시키고 교란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해서 인공적으로 만든 물질에 점점 더 의존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 물질인 음식물로 섭취하는 비타민은 보통은 구성 성분 중의 아주 일부로 과다 섭취로 죽을 정도로 섭취하려면 아마도 그 전에 배가 터져 죽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인공적으로 자연에서 축출해 농축하거나 합성해 만든 것을 한 숟가락 먹는다면 어쩌다 약이, 그러나 그보다는 독이 될 것이다.

  인간에게서 뱀이나 독버섯 등과 같이 대부분의 동물들은 자신에게 위험한 것들은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인공적인 것들은 진화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대부분 정보가 축척되지 않아 감각적으로 위험성을 감지하기 어려워 쉽게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우리가 이루어낸 현재의 풍요에는 인공 합성 물질의 역할이 주요했기에 자연 물질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만큼이나 인공 합성 물질에 대한 맹목적인 불신 역시 위험하다. 우리에게 진정 위험한 것은 나쁜 사람은 항상 나쁘고 착한 사람은 항상 착하다는 흑백 논리를 가지는 것처럼 자연 물질도 인공 합성 물질도 아닌 이분법적인 사고방식과 맹목적인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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