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진화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길들여진 동물의 진화에 걸리는 1만 년의 시간으로는 부족하다.
야생동물만큼 100만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야생동물이며, 앞으로도 줄곧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 찰스 골턴 다윈(Charles Galton Darwin, 1887~1962)
<다음 백만 년(The Next Million Years)> 중 7장
인간의 진화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길들여진 동물의 진화에 걸리는 1만 년의 시간으로는 부족하다.
야생동물만큼 100만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야생동물이며, 앞으로도 줄곧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 찰스 골턴 다윈(Charles Galton Darwin, 1887~1962)
<다음 백만 년(The Next Million Years)> 중 7장
5/20(금) 계방산 줄기를 산행하다
길을 잘못 들어 저녁까지 하산하던 중(랜턴도 안 가져 갔었죠. ^^;)
임도에 육식동물 똥이 계속 널려 있어 혹시나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능선으로 도망가는 동물이 있었습니다.
산에 올라가자마자 도망가는 암컷과 수컷 노루 두 마리를 보고
산을 헤매다가 멧돼지 두 마리 도망가는 것 봐서
처음엔 노루인줄 알았는데 색깔이 회색에 더 가깝고
뛰는 모습도 껑충이지 않고 거기다 꼬리가 출렁~
숲에 가려 머리는 보지 못하고 몸통과 꼬리만 봤지만
크기나 털색 등 늑대라는 확신이 들어
똥을 수거해 왔습니다.
이거 DNA분석으로 늑대가 맞는지 알 수 있을까요?
비용없이 분석을 해 주실 수 있는 분 있으면 알려주세요.
조상우(017-728-3472, endofred@hanmail.net)
흙이 좀 묻었고,
비를 좀 맞아서 축축한 똥을 비닐봉지에 넣어서
집에 와 봉투를 열어 두었더니
작은 파리가 와서 구더기를 슬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말리는 과정에서 곰팡이가 좀 피었네요.
전체적으로 털로 뭉쳐 놓은 모양으로 살쾡이 똥보다는 큰 것 같고
냄새도 거의 나지 않았습니다.
복장은 겨울 산행 복장에 가능하면 아이젠과 스패츠를 준비해 오시면 됩니다.
인원은 꼭 40명이 아니라 크게 상관하지 않으셔도 되고,
혹시 인원 초과로 마감되었다고 하면 저한테 연락 주세요. ^^
조상우(017-728-3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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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은 전체 인구의 10%인 2백여만 명이 채식주의자로 나타났습니다.
고기는 안먹지만 생선이나 달걀은 먹는 '부분 채식주의자'까지 합치면 전체 인구의 약 30%가 채식을 하는 셈입니다.
-YTN 박종은 기자(2013-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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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우의 예를 들면 생산의 양이나 물의 소비, 에너지의 소비, 환경 오염에 있어서도 평균 20배 정도로 비효율적이고 비환경적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고기의 못 먹는 부분을 제외시키고 곡류와 건량 비율 등을 고려한 계산에서 나온 것입니다. 단순히 사료 먹인 양 대비 늘어난 무게만으로는 7배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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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일제 시대 맹수가 사라진 것은
공식 기록으로 남은 것만 해도 호랑이 140여 마리, 표범과 늑대, 반달가슴곰을 1,000여 마리씩 모두 3,000마리이상 잡았다고 해. 이 때부터 우리의 수가 줄어들기 시작한 거야.
[출처] 한반도의 멸종위기 동물들-우리가 사라진 이유 |작성자 포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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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인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간 공식 포획된 표범의 수는 625마리이다. 이 중 1910~1914년과 1925~1932년 13년 동안은 공식 기록이 비어 있다.
1924년까지 총 521마리의 표범을 무더기로 포획,그 이후 포획수가 크게 감소한것으로....
"통계가 빠진 시기가 있는 것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그 2배에 해당하는 호랑이와 표범이 잡혔을 겁니다."
[출처] 삽살개,강치, 한국 호랑이,표범이 사라진 이유|작성자 김삿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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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의견으로는
한반도에서 영물로 사랑 받아 온 그 많던 호랑이,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
기사입력 2013-04-24 03:00:00 기사수정 2013-04-24 19:44:23
일제의 무분별 포획? 치명적 주범은 17세기 소전염병!
‘호랑이 사학자’ 김동진 씨 주장
조선시대 최고의 호랑이 그림으로 꼽히는 단원 김홍도의 ‘송하맹호도’. 작품에서 드러나듯 한반도에서 호랑이는 장엄한 기상을 지닌 영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호암미술관 제공hot ´이것´있으면 아토피 치료 가능하다?new 라식 or 라섹 할 때 중요한건 비용?photolink김동진 한국범보전기금 인문학술이사.“착하고 성스럽고 문무를 겸비했다. 자애롭고 효성스러우며 지혜롭고 인자하다. 엉큼하면서 날래고 세차면서도 사나우니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다.”(연암 박지원·1737∼1805)
연암이 극찬한 것은 선비나 장수가 아니었다. 한반도에서 수천 년 영물(靈物)로 사랑받아 온 호랑이다. 조선시대까지 산신령이자 수호신으로 추앙받던 이 땅의 아이콘. 그들은 왜 한반도에서 사라졌을까.
여러 설이 분분하지만, 그간 국내외 학계는 호랑이가 멸종된 주된 이유로 일제강점기 해수구제(害獸驅除·인간에게 해로운 동물을 없앤다) 정책을 꼽아왔다. 대표적인 한반도 호랑이 연구가인 엔도 기미오 일본 야조회(野鳥會) 명예회장도 1986년 저서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에서 당시 무분별한 포획을 핵심 요인으로 봤다. 당시 일제는 농지 개간과 짐승가죽 획득이라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노렸다. 이를 위해 호랑이를 비롯한 범, 늑대 사냥을 방조 혹은 장려하면서 조선의 야생 생태계가 망가졌다는 시각이다.
일제의 횡포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호랑이가 사라진 것은 이보다 병자호란 전후에 발생한 ‘우역(牛疫·바이러스로 발생하는 소의 전염병)’을 더 결정적 요인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호랑이 사학자’로 알려진 사단법인 한국범보전기금의 김동진 인문학술이사(47·전 서울대 BK연구교수)는 “17세기 중국 심양에서 발생한 우역이 기근과 겹치며 호랑이가 조선 땅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김 이사에 따르면 일제의 남획을 원인으로 꼽는 주장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 마구잡이로 사냥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당시 총독부 자료를 보면 1919∼1924년 포획한 호랑이는 65마리였다. 1년에 10마리 안팎인데, 상당수 중국 러시아와 맞닿은 함경도(40마리)에서 잡혔다. 이는 이전 시대와 비교하면 그 수가 너무 적다.
17세기 병자호란 직전 상황을 살펴보자. 1633년 무안 현감이던 신집(申楫·1580∼1639)이 올린 보고서에는 각 군현이 해마다 호랑이 가죽 3장을 바쳤다는 대목이 나온다. 전국에 군현이 330여 개였음을 감안해 단순 계산하면 1년에 약 1000마리를 잡았다. 그런데도 이 제도를 유지할 만큼 호랑이 개체는 넉넉했다. 10 대 1000. 이 엄청난 간극을 만든 원흉이 바로 우역이었다고 김 이사는 진단했다.
조선 후기 화가 이인문(1745∼1821)이 그린 ‘수렵도’에는 호랑이를 사냥하는 모습이 담겼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인조실록(仁祖實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소현세자가 쓴 심양장계(瀋陽狀啓)를 보면 우역이 어떻게 조선에 퍼졌는지 상세히 알 수 있다. 인조 14년(1636년) 청나라 심양에서 발생한 우역은 8월 평안도에서 처음 발견됐다. 같은 해 12월 병자호란이 한반도를 휩쓰는데 이때 우역도 전국으로 퍼졌다. “한양에 소가 한 마리도 없다”거나 “소가 멸종할 처지에 놓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 경신대기근(庚辛大飢饉·1670∼1671)까지 겹치며 한반도의 곤궁은 절정에 다다랐다.
국토의 황폐화는 당연히 호랑이 생존에도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호랑이가 잡아먹는 사슴의 급감이었다. 소와 같은 우제류(偶蹄類·짝발굽동물)인 사슴에게도 우역은 치명적이었다. 주요 먹잇감을 잃은 호랑이의 시련은 멈추지 않았다. 대기근에 빠진 백성들이 산림을 파헤치고 화전을 일궜다. 호랑이는 영역과 사냥감 모두 난관에 봉착했다.
이로 인해 호랑이는 안타깝게도 최악의 선택에 빠진다. 백주 대낮에도 인가를 침입해 해를 끼치는 사고가 훨씬 잦아졌다. 결국 민관은 이전까진 나라에 바칠 때나 나서던 호랑이 사냥에 총력을 쏟기 시작했다. 이런 삼중고가 겹치며 호랑이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남은 개체들도 한반도를 떠나 시베리아 등지로 영역을 옮겨갔다.
호된 시련을 겪으며 호랑이는 18세기에 이미 희귀동물로 전락했다. 영조 4년(1728년) 왕실은 호랑이 가죽을 국가에 바치던 제도를 폐지하기에 이른다. 잡히지도 않는 호랑이 탓에 백성들의 고충만 막대하다는 판단이었다. 중국에서 건너온 우역이란 돌멩이가 일으킨 파문이 한반도에서 호랑이를 휩쓸어버리는 나비효과를 일으킨 것이다.
김 이사는 “병자호란 전후에 전파된 우역은 국가의 근간을 바꾸는 괴력을 발휘했다”며 “이때 호랑이는 대부분 사라졌고 겨우 명맥만 유지했는데 일제가 숨통을 끊은 셈”이라고 설명했다. 김 이사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논문을 이달 말 한국역사연구회와 대한의사학회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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