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증편향의 도전과 평생학습의 응전
#1 인지부조화
나는 흡연자다
우리나라도 지난 12월 23일부터 담뱃갑에 경고문구와 함께 혐오스런 사진 표기를 의무화하기 시작했다. 실제 실험에 따르면 흡연자에게 경고그림을 보여 준 후 뇌 MRI 촬영을 하였더니 공포반응을 일으키는 뇌 영역이 활성화되었다고 한다. 경고 사진이 단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시각요소를 넘어 회피하고 싶은 반응을 본능적으로 일으키게 한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끽연을 즐기고 있다. 그렇다고 흡연에 대한 회의와 갈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몇 차례 금연을 시도했다. 아니 ‘시도만’ 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나의 의지는 무쇠처럼 단단하지만 유혹 앞에만 서면 왜 그리 한없이 말랑거리는지. 30년을 벼리고 벼려 생불이라 칭송받았으나 황진이의 단 한번 유혹에 속절없이 무너진 지족스님, 딱 그 짝이다. 니코틴을 달라는 육체의 아우성에 허벅지를 푹푹 찌르며 제압을 시도하지만 ‘딱 한 모금’의 유혹 앞에 맥없이 무너지고 만다.
단단히 조인 마음이 가뭇없이 풀리는 것을 보는 일은 참 씁쓸한 일이다. 특별한 계기와 자극에 의해 신발끈을 아주 꽉 조인 결심일수록, 그리고 그것을 주변인에게 호기롭게 장담했다면, 그 참담함의 질량은 몇 배는 더 커지고 내상은 더욱 깊어진다. 이런 참극을 마주하게 되면 ‘어휴 이번에도 또’ ‘내가 그렇지 뭐’라고 하는 자조의 정조가 먼저 찾아든다. 심할 경우 자존감이 가을 낙엽처럼 바닥을 뒹굴고 만다. 깊은 한숨과 초점 없이 허공을 떠도는 눈동자. 이때 폐 깊숙하게 빨아들이는 담배 연기는 헛헛하다.
금연 실패와 여우의 신포도
전군표 전 국세청장은 CJ그룹으로부터 세무조사 무마를 청탁 받아 2013년 뇌물죄로 실형을 선고 받았다. 법정에서 그는 금품을 받지 않았다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이에 대해 ‘인지부조화’라며 다음과 같은 니체의 말을 인용했다. “내 기억은 그것을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 자존심은 그것을 했을 리가 없다고 말한다. 기억은 결국 자존심에 굴복한다.”
흡연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금연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금연에 실패할 경우 ‘건강과 실패’라는 두 가지 사실에서 부조화가 발생하게 된다. 이럴 때 심리적 긴장이 유발되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해소하고 심리적 안정을 찾으려고 하는 과정에서 합리적이지 않은 판단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나 같은 금연 실패자들은 ‘금연하면 살쪄서 오히려 건강이 악화된다’, ‘금연 스트레스 받고 사느니 편하게 사는 게 낫다’, ‘담배 핀다고 다 폐암 걸리는 게 아니다’ 등등의 자기합리화를 악착같이 하게 되는 것이다. 안쓰럽게.
배도 고프고 더위에 지친 여우가 포도를 따먹으려 하지만 제 아무리 옴짝거려봐야 헛일. 결국 쓸쓸하게 돌아서던 여우가 한 마디 내뱉는다. “저 포도는 시단 말이야.” 그래서 금연 실패자들은 모두 여우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정신승리를 하지 않으면 저 포도는 너무나 달콤할 것 같고 갈증과 허기는 미친 듯 나를 파괴할 테니 말이다.
#2 확증편향
전원책과 <백분토론>
지난 1월 3일 JTBC 신년 토론회 풍경. 이재명 성남시장의 발언을 중도에 싹둑 자르고 들어가길 수차례. 단지 예의 없는 끼어들기만의 문제가 아니라 십여 차례 계속된 진행자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험한 표정과 고성으로 토론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전원책 변호사. 그는 이 일로 단박에 국민주책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이번 토론에서 전원책 변호사는 심각한 태도의 문제를 보였지만 일반적인 토론 프로그램은 어떨까. <100분토론>이나 기타 토론 프로그램을 수년간 시청해 본 소감은 ‘토론이 아닌 주장’의 성격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특히 정치인이 참여할 경우 더더욱 토론을 통해 합의와 결론이 도출되기 보다는 각자의 주장만이 넘실대다 끝나고 마는 것이 일반적이다. 왜 그럴까. 남루한 진영논리가 기저에 깔려 있기도 하고, 유권자가 지켜보고 있으니 설사 자신의 의견이 잘못되었더라도 쉽사리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니 백분토론이 아니라 설사 끝장토론을 한다고 해도 결코 ‘끝장’이 나질 않는다.
정치인 VS 일반인
그렇다면 유권자의 표를 의식해야만 하는 정치인, 그런 그들을 오징어 씹듯 손가락질 하던 일반 시민은 과연 상식과 합리성에 근거해 논의를 전개할까?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아니 불가능의 영역이다. 어떻게 토론이 이뤄지는 모든 현장을 다 확인해 볼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유추해석해 볼 수는 있겠지만 이것도 자신이 경험한 특정한 모습을 근거로 한 일반화의 오류에서 벗어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말들을 듣다보면 인간이란 생각보다 몰이성적이어서 결국 합리적이지 않은 태도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투자의 귀재라는 워렌 버핏은 "사람들이 가장 잘하는 것은 기존의 견해들이 온전하게 유지되도록 새로운 정보를 걸러내는 일이다." 라고 일갈한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정보는 의도적으로 차단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좀 더 자세하게 확인해보려면 베이컨을 소환하면 된다. "인간의 지성은 일단 어떤 의견을 채택한 뒤에는... 모든 얘기를 끌어들여 그 견해를 뒷받침하거나 동의한다. 설사 정반대를 가리키는 중요한 증거가 훨씬 더 많다고 해도 이를 무시하거나 간과하며... 미리 결정한 내용에 죽어라고 매달려 이미 내린 결론의 정당성을 지키려 한다." 아주 짧고 간명한 이야기로는 <로마인 이야기>를 저술한 시오노 나나미의 말이 참 제격이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이것은 일종의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과 관련한 발언인데 결국 사람들이 확증편향에 놓여 있는 한 제대로 된 토론과 합리적 결론을 내리기는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법관과 반기문
확증편향으로 인한 장삼이사들 간의 토론이 제 아무리 엉망으로 마무리되었다 할지라도 서로 빈정상함과 앙금이 남을 수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재물의 손상이나 신체의 구속 같은 형벌적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끼치는 파급력이 굉장한 법관이 이런 확증편향으로 인해 제대로 된 판결을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원고를 쓰기 위해 자료를 뒤적이다 보니 2010년 1월 13일자 <법률신문>의 한 기사가 눈에 띄었다. 법원행정처는 ‘법관의 의사결정인자 분석연구용역’을 발주하였는데 이에 책임연구원인 서울대 김정택교수가 약 50명의 법관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해 일반인에게서 나타나는 인지적 편향이 판사들에게도 나타나고 있는지,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원인 및 방지대책이 무엇인지와 관련하여 조사연구를 한 것이다.
결론은? 안타깝게도 판사가 일반인보다 확증편향이 크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김교수는 또한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당사자의 주장을 경청하지 않고 선입관을 갖는 한 판사들이 재판과정에서 쉽게 확증편향에 빠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사람들이 법관에게 솔로몬의 지혜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객관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시시비비를 제대로 가려달라는 것인데 법관이 일반인보다 더 높은 확증편향이 있다면 그 판결결과를 어느 정도 신뢰해야 하는 것일까. 법관은 단지 한 명의 전문가가 아니라 사람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자이다. 한 인간을 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단절시킬 수도 있는 막강한 권력이 그 손 안에 있기 때문에 확증편향은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사회적으로 권한과 권력이 큰 사람일수록 훨씬 엄격하고 꼼꼼한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대선 국면에 들어서면 이루어지는 각 후보자에 대한 각종 미디어의 세심한 검증작업이 그와 같은 일이다. 이 과정에서 반기문 씨가 대선 출마 포기를 선언했다. 나는 그의 포기 선언 전문을 몇 차례 읽어 보았는데 그야말로 전형적인 자기합리화, 인지부조화의 결정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자신의 준비 소홀이나 각종 어려움을 헤쳐 나갈 내공의 부족에 대한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들고 오직 외부의 요인만 나열되어 있다. 그저 ‘포도는 시다’고 말한 것이다. 자신을 성찰하는 힘 속에서 우리는 그 사람의 품격을 읽을 수 있는데 이런 측면에서 보면 반기문 씨의 조기 불출마 선언은 우리 국가를 위해 참 다행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다.
미국 공화당원과 민주당원에 대한 MRI 결과
인지부조화가 스스로 자기방어기제를 만드는 내적 일관성에 관한 것이라면 확증편향은 기존의 생각을 고수하고 강화하는 쪽으로 정보를 선별 취득하는 외적 일관성에 관한 것이다. 확증편향은 상당히 강력하고 침투력이 뛰어나기에 웬만해선 막을 수 없다. 이런 확증편향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연구사례가 많이 있는데, 더 눈길을 끄는 것은 확증편향이 단지 심리적인 편향의 문제가 아니라 생물학적 본능과도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는 인체실험이다.
많이 언급되는 사례는 2004년 미국 대선 당시 공화당원과 민주당원 30명을 대상으로 MRI 촬영을 한 애모리대학 웨스턴 교수의 연구결과이다. 뇌를 스캔한 자료를 보면 추론기능을 담당하는 부위는 활성화되지 않은 반면, 감정처리와 관련한 부위는 가장 활성화되었다. 더불어 갈등해결이나 도덕적 책임과 관련한 부위가 활성화되었던 것이다. 이 실험 역시 사람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보다는 자기 입맛에 맞는 정보만을 선별해서 수용한다는 점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웨스턴 교수는 이런 결론을 맺었다고 한다.
“마치 당원들이 ‘인지적 만화경’을 자신들이 원하는 결론이 나올 때까지 빙빙 돌리는 것 같다. 그리고 일단 그 결론을 얻으면 엄청난 힘으로 강화되며 동시에 부정적인 감정 상태는 제거하고 긍정적인 것은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3 확증편향의 도전과 평생학습의 응전
“정보량이 늘수록 여론은 더욱 악화된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중앙일보에서 본 한 칼럼 때문이다. 작년 9월에 확증편향과 관련한 이 칼럼을 읽고는 가위로 오려 책상 옆 칸막이에 붙여 놓았다. 카스 선슈타인 하버드대 교수가 본래 <The New York Times>에 쓴 이 칼럼의 제목은 “‘사실’만으로 논쟁에서 이기기 힘든 이유”이다.
칼럼을 읽고 나니 나의 고민은 더 깊어지기 시작했다. 단순한 취미교양 수준의 프로그램이라면 별 관계는 없겠지만 가치관‧태도와 관련있는 시민교육 영역에서는 이 문제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확증편향의 영향 아래 놓여있다면 과연 학습은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당연히 개인에 따른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학습자가 자신의 기존 가치관을 확대하고 강화하는 쪽으로 외부 정보를 선별해서 취득한다고 하면, 무비판적으로 흡수하거나 혹은 반대로 무조건적으로 배척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평생학습은 어떤 포지셔닝을 취해야 할 것인가. 아니 과연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수는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고민 때문에 그 칼럼은 지난 9월부터 여직 내 책상 옆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좀 길긴 하지만 이 칼럼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중앙일보 칼럼 – 카스 선슈타인 「The New York Times」>
카스 선슈타인 교수는 미국인 300명에게 “기후변화는 인간이 야기한 지구 오염 때문이라 생각하느냐”와 같은 질문을 했고 이에 대해 어떤 대답을 했느냐에 따라 3개 그룹으로 나눴다. 기후변화가 인간의 잘못 때문이라고 강하게 믿는 그룹, 중간 수준으로 믿는 그룹, 거의 믿지 않는 그룹으로 3등분한 것이다.
그리고는 참가자들에게 “2100년까지 미국의 평균기온은 6도 이상 상승할 것”이란 과학계의 다수설을 알려준 뒤 “당신은 2100년까지 온도가 몇 도 상승할 것으로 보느냐”고 물어봤다. 제출된 답의 평균 온도는 5.6도 상승이었는데 역시나 3개 그룹 간에 큰 격차가 발생했다. 기후변화를 강력히 믿는 그룹은 6.3도 오를 것으로 봤지만 중간 그룹은 5.9도, 거의 믿지 않는 그룹은 3.6도 오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이 실험에서 정말 중요한 대목은 다음이다. 300명을 다시 무작위로 2개 그룹으로 나누어 기후변화에 대한 ‘희소식’과 ‘나쁜 소식’을 들려주었다. 참가자의 절반에게는 “기후변화가 생각만큼 빠르지 않아 과학자들이 온도 상승 예상치를 1~5도로 내렸다”는 희소식을 들려 주었다. 나머지 절반에겐 ‘나쁜 소식’이 전달됐다. “기후변화가 생각보다 심각해 과학자들이 온도 상승 예상치를 7~11도로 올렸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희소식과 나쁜 소식을 각각 들은 참가자들은 “다시 한 번 본인이 예상하는 온도 상승치를 제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 실험 결과 기후변화가 인간의 잘못 때문이라고 믿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안심시키는 정보에 민감하게 반응한 반면, 경각심을 일깨우는 정보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반면 기후변화가 인간의 잘못 때문이라고 강하게 믿는 사람은 정반대의 패턴을 보였다.
이러한 실험을 통해 카스 교수가 하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타인이 생각하는 자신의 매력과 성공 가능성에 대해 정보를 얻으면 좋은 소식에만 편향되게 반응한다. 기후변화가 인간의 잘못 때문임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정치적 정보도 마찬가지이다. 새롭게 드러난 사실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위협하면 사람들은 이 소식을 무시해버린다.
이번 실험의 결과는 각종 현안마다 여론이 양극화되는 이유를 보여준다. 버락 오바마의 의료보험법을 예로 들면, 이 법안 덕분에 빈곤층 수백만 명이 의료보험에 가입할 수 있었다는 희소식과 이 법안으로 인해 보험료가 올랐다는 나쁜 소식이 동시에 나온다. 법안 지지자는 희소식에, 법안 반대자는 나쁜 소식에 각각 강하게 반응한다. 정보량이 늘수록 여론은 더욱 양극화 된다."
개방성을 어떻게 키워나갈 것인가
수원시평생학습관의 경우 연간 300개가 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런데 프로그램 기획자들은 ‘어떤 메시지를 던질 것인가’에 주목하여 고민을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더 애를 써야 할 것은 어쩌면 메시지가 ‘어떻게’ 수용 되느냐의 측면에 있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확고히 정립된 성인들이 한 두 번의 메시지 접촉으로 그것을 바로 수용할 리는 만무하다. 그래서 평생학습 현장은 자주 기획자의 의도와 학습자의 결과 사이에서 큰 괴리가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들이 기존의 가치관에 단단히 결박되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 있어 자신만의 필터링을 하게 될 때, 그렇다면 평생학습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철학자 칼 포퍼의 말에서 하나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옳다고 하는 만큼 우리는 언제나 틀릴 수 있다. 언제 틀릴지는 알지 못한다.”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게 하는 것. 유한한 인간이 완벽할 수는 없는 일이고 우리가 인간인 이상 우리는 이 진실 앞에서 겸손해질 수 밖에 없다. 오류 가능성은 다른 말로 하면 개방성이다. 결국 자신의 오류 가능성 따라서 자신과 다른 생각에 대한 ‘개방성’을 일깨우는 것이 중요하다. 일종의 인문학적 기초근육인 셈이다. 이런 개방성 속에서 외부 정보를 유연하게 처리하게 될 때 사람의 성장과 변화가 의미 있게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교수자가 아닌 동료를 바라보도록
그러나 개방적 자세가 끝이 아니다. 오픈 마인드를 가져 이질적인 생각을 적대시하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질적인 정보와 콘텐츠는 필연적으로 궁금증과 혼란을 야기한다. 이때 동료들이 필요한 것이다. 해당 콘텐츠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전달하는 교수자가 아니라 자기와 함께 학습하는 평범한 동료와의 대화와 토론이 중요하다. 그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 근거는 무엇인지, 기존의 자기 인식과의 불화를 어떻게 조율해 나가는지 등등을 개방적인 태도로 보고, 듣고, 참여하는 가운데 자기의 생각을 정리해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교수자에게로 향해있는 학습의 공간구조를 동료를 바라볼 수 있도록 바꾸어야 한다.
물론 학습자가 어떤 맥락에서 학습의 장으로 들어왔는지를 잘 파악하는 것, 그리고 이런 과정이 일회성이 아닌 지속성을 갖추도록 하는 것 등등의 산적한 과제가 평생학습 현장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것을 다루는 것은 다음으로 슬쩍 밀어 두겠지만 일반적으로 우리 모두는 확증편향의 영향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 앞에 겸손해져야 한다.
확증편향으로 인해 제대로 진실을 알아가기 어렵고 그로인해 때로는 서로에게 야수가 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미래가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특히 평생학습의 현장은. 우리가 학습의 힘에 절망하지 않는 한 말이다.
카스 선슈타인 교수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칼럼을 끝맺는다.
“그러나 ‘사실’이 ‘이념’을 이기지 못한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내 실험에서 새로운 정보를 들은 참가자들의 과반수가 입장을 조정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보를 들었음에도 입장이 전혀 변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은 새로운 정보에 따라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의견을 바꿀 용의가 있음이 확인된 것이다. 학습과 민주적 자치의 가치를 믿는 이에겐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