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경제 성장이 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떠든 때가 있었다. 3%, 은행 이자만큼은 성장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성장 신화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 깨졌다. 많은 자영업자들과 중소기업들이 인원을 줄이고 폐업을 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지만 나라가 망해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거나 세계 경제가 완전히 붕괴되는 일은 없었다. 하다못해 20년 전, 아니 10년 전으로 경제가 퇴보하지도 않았다. 배달업이나 마스크 제조업 등 코로나 관련 산업은 오히려 급성장했다. 일본의 경우 잃어버린 30년 동안 다국적기업들이 그 지위를 잃고 국민들이 허리띠를 더욱 졸라매었지만 망하지도 않았고 아직도 국제 사회에서 무시당할 정도로 국력이 쇄약해지지도 않았다.
이런 우려는 우리가 이미 성장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80~90년대에 시골에서 올라온 외할아버지의 말씀이 기억난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일 년에 한 번 자식들이 모여 살던 수원으로 올라와 열흘에서 보름 정도 나들이도 하고 자식들 집에서 지내다 내려가셨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올라오실 때마다 수원의 모습이 변해서 길을 찾기 힘들다고 하셨다. 수도권 도시에서 80년대 이후 과연 한 번이라도 공사가 끊긴 적이 있었던가? 2000년대에 들어서도, 2010년대에 들어서도 더 이상 아파트나 건물을 지을 때가 없겠지 생각했지만 2020년대가 들어서도 타워크레인이 한 번도 완전히 철거된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나는 2000년을 전후로 사진 동호회 활동을 열심히 했다. 매달 한두 번은 동호회원들과 지방의 사진 찍기 좋은 명소를 찾아다녔다. 2~3년에 한 번은 다시 찾는 곳이 있는데 갈 때마다 길을 헤매기 일쑤였다. 새로운 도로, 특히 자동차전용도로가 지방 중소도시들 간에 생겨 알던 길을 찾기 어려워져서 길을 잘못 들었기 때문이다. 사진 찍을 시간을 확보하려면 가는 시간을 아껴야 하는데, 이런 도로들은 주말에 더욱 편리했다. 다들 세상 좋아졌다고 했다. 하지만 교통량을 보면 굳이 이런 도로들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이 정도는 생필품이 된 가전제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어렸을 때 동네의 부자들만 갖고 있었던 흑백텔레비전이나 전화기가 어느 순간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그때는 보통 집에 트랜지스터라디오가 보급되어 있는 정도였다. 요새 젊은이들에게는 동네사람들이 모여 함께 텔레비전을 보는 모습은 물론 지금은 집에 아예 없거나 장식품이 되어 버린 일반 전화기를 돈을 주고 이용했다는 말은 그야말로 전설이 되었다. 흑백텔레비전이나 전화기에서 시작 된 전자제품은 선풍기, 세탁기, 컬러텔레비전, 비디오, 에어컨 등 생각하지도 못했던 제품과 가스레인지와 보일러 등의 등장과 구입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성장과 풍요의 달콤함에 빠져들었고 이를 제대로 즐겼다. 새로운 전자제품의 등장과 구입은 우리를 설레게 했다. 그런데 다들 알고 있듯이 새로운 전자제품은 이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다. 정수기, 김치냉장고, 식기세척기, 스타일러, 와인셀러, 핸드폰에 이어 스마트폰까지 굳이 필요할까 싶은 제품까지, 집의 크기를 늘리지 낳으면 더 이상 설치 불가능한 지경에까지 등장했고, 우리는 더더욱 편리함과 소비에 중독되기 시작했다.
옛날에는 꿈도 못 꾸었던 제품이 지금은 당연히 있어야 할 생필품이 되었을 뿐 아니라 IoT, AI, AR, VR 등 새로운 4차 산업혁명의 세상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도록 미디어에서 분위기를 더욱 조장하였다. 성장의 속도는 우리는 제대로 적응하기 어려울 만큼 빨라 조금만 방심해도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우리는 멈출 수 없게 되었다. 여기서 멈추면 우리는 뒤쳐지고 끝내 소외당하고 거세될 불안함에 떨게 했다. 우리는 필리핀이나 아르헨티나처럼 경제를 망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런데 이 성장 열차는 과연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릴 수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는 원자재를 수입해서 가공한 것을 수출해 먹고 사는 나라다. 우리나라의 성장 신화는 수출 신화다. 수출만이 살길이었다. 상품은 물론 사람도 수출해야 했다. 독일로, 베트남으로, 중동으로 굶지 않기 위해서, 남들보다 잘 살기 위해서 우리는 낯선 땅에서 땀과 피를 바쳐야 했다. 우리는 또 돈이 되는 산업을 위해 돈이 되지 않는 농업을 기꺼이 희생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우리는 부족한 에너지를 수입했고, 값싼 농산물과 공산품을 수입해 풍요를 누릴 수 있었다.
한때 미국 마트에서 중국 상품 없이 생활할 수 있을까 조사를 해봤더니 마트 상품의 70% 정도가 값싼 중국산이라 서민들은 중국 상품 없이 생활하기 어렵다는 결론이 나온 적이 있다. 미국은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임에도 더 풍요로워지기 위해서 자급할 수 있음에도 더 싸게 구입할 수 있는 상품을 수입하는 나라다. 우리나라는 천연자원이 별로 없기에 수출로 돈을 벌어 값싼 농산물과 공산품을 수입해 풍요를 누리는 대표적인 나라다. 더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 우리는 돈을 더 벌려고도 하지만 같은 상품을 더 싸게 구입하려고 많은 나라와 자유무역협정도 맺고 있다. 미국은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식량과 에너지가 넘쳐 수출하는 나라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식량과 에너지를 수입하지 않고서는 생존이 어려운 나라다. 생존에 가장 필요한 식량과 에너지의 수입 의존도가 너무 심해 심각할 정도이지만 역대 정부들은 언제든지 수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성장하지 않는다고 우리 생활이 불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소득이 15,000달러 이상이면 행복은 소득과 상관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성장에 중독된 사람들에게 이런 말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세계 기후 위기와 코로나 같은 전염병,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같은 전쟁 등과 같은 요인으로 우리는 언제든지 준비되지도 않은 채 급격히 탈성장 시대를 맞이할 수 있다. 바람직한 방향은 우리가 스스로 탈성장 시대를 준비해 자급자족으로 충분히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지만 상황이 녹록하지만은 않다.
농업 발달은 세계 인구를 늘려 왔다. 과거 한 지역의 인구 증가는 그 지역의 농업 생산력이 감당할 수 있는 한에서 가능했다. 농업 생산력은 다양한 농업 기술의 발전에 의해서 증가했지만 근대에 들어서는 농약, 비료와 농기계에 의존해 증가했고 세계 인구도 그에 따라 급격히 증가했다. 뿐만 아니라 사실상 사치품이라고 수 있는 각종 전자제품의 증가로 전기 등 에너지가 생존에 꼭 필요한 양에 훨씬 넘치게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다 지금은 농산물을 스스로 생산할 수 없어도 인구가 증가하는 만큼 수입할 수 있으면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탈성장 시대에는 지금과 같은 인구와 풍요가 유지될 수 있을까?
우리나라의 식량과 에너지 자급력은 국민 모두에게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을 보장하기는커녕 생존시키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 탈성장 시대에는 우리가 주력했던 수출 주도의 경제 체계를 바꿔야 한다. 세계가 여러 이유로 급격히 탈성장으로 돌아서면 위기를 극복하기에 희생이 너무 크다. 우리는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자발적으로 탈성장 시대를 차분히 준비해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생존을 위한 식량과 에너지만을 자급자족하기에도 현재 우리나라의 인구는 너무 많다. 지금 인구가 줄어들어 인구를 늘리기 위해 각종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나는 오히려 반대한다. 이는 매우 근시안적인 정책으로 다시 인구를 늘리면 20~30년 후에는 나이별 인구가 모래시계 모양으로 분포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생산력 있는 인구가 깔때기 모양의 지금 분포보다 늘어난 인구만큼 더 큰 희생을 감당해야 한다. 그만큼 자급자족과도 더 멀어지기 때문에 인구는 우리 국토가 자급자족할 수 있는 만큼 인구를 줄여야 한다. 내수만으로도 성장하기 위해서 인구가 1억 명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인구가 가능한 적을수록 좋다고 본다. 자급자족을 위해서 우리나라의 국토 상황으로는 많아도 현재 인구의 1/2은 넘지 않아야 한다.
탈성장 시대에 산업 구조는 자급할 수 있는 에너지로 가능한 농업 생산성을 높이는 산업을 주축으로 변해야 할 것이다. 에너지도 자급할 수 있는 천연자원과 자연을 활용한 에너지 생산에 맞춰 자급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미리 준비할수록 희생은 줄어들 것이고, 준비가 늦을수록 희생은 커질 것이다. 몇 만, 몇 십만 명의 문제가 아니라 천만 단위 희생이 발생할 수 있는 일이 당장 눈앞에 펼쳐지지 않는다고 설마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