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주의(녹색주의)

직장인 장일순

- '좁쌀 한알' 발제문


‘좁쌀 한알’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지금 사회에서 평범한 생활을 하는 직장인이 무위당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있는가이다. 바로 당신이 무위당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아니, 무위당이 지금의 당신과 같은 환경 속에서도 무위당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이다.

나는 한 마디로 불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무위당이 물려받은 재산도 별로 없고 특별한 재주도 없고 교육도 특별히 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일하지 않으면 가족이 모두 당장 끼니를 굶어야 할 처지라면 무위당이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

특별한 재주도, 물려받은 재산도, 지식도, 인맥도 없는 무위당은 먹고 살기 위해서는 결국 평범한 직장을 구해야 한다. 그가 속한 집단의 이익이 다른 집단의 손해에 의한 것이고, 다른 집단의 이익이 그가 속한 집단의 손해를 의미하는 경제 활동 속에 속해 있을 수밖에 없는 무위당은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대인의 생활이란 모든 게 분리되어 있어서 어느 한 부분이 모든 부분을 의미하는 농경생활과는 분명 거리가 있다.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는 가족과 이웃과 농사 등 모든 관계 분리되지 않고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농사일이 가족의 일이며 이웃의 일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사회는 모든 것이 분리되어 있다. 가족, 이웃(취미 모임 등), 일이 분리되어 있어서 일에 열중하면 가족에 소홀해지고 가족에 열중하면 이웃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도 물론 자신을 낮출 수는 있을 것이다. 친구들이나 어린이 앞에서도 당장 땅바닥에 엎드려 절할 수 있고, 오지랖 넓게 여기 저기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줄 사람을 찾아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까지일까. 며칠을 집을 직장을 비우고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있나 알아보러 다닐 수 있을까? 누군가 자신을 찔렀을 때 칼을 닦아주며, 찌르느냐고 수고 많았다고 위로해 줄 수 있을까? 아니 가족을 위해서라도 찔리기 전에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찔린 후에도 살아나려고 발버둥 쳐야 하지 않을까.

직장인 장일순이라면 이 시대에 어떤 고민을 하며 어떻게 살아갔을까. 나는 직장인 장일순이 무척 궁금하다. 내가 고민하고 살아가는 것과 어떻게 다를 것인가가 궁금하다. 분명 무위당은 존경받아 마땅한 이 시대의 선생님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벽을 느낀다. 평범한 집안과 평범한 능력을 갖고 이 시대의 훌륭한 인격체로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이미 무위당이 보여준 것을 무지한 내가 알아채지 못한 것일까? 완전해 보이는 인격만이 완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진정한 개혁은 실천에서부터 정책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분리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서로 모순되는 모든 것을 실천할 수 없다. 불완전한 실천으로 우리는 완전한 사회를 만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무위당의 반만이라도 닮으려고 노력한다면 분명 우리는 모순된 현실을 개혁할 수 있지 않을까? 실천이 없으면 아무 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 완전한 하나의 실천이 아니라 불완전한 실천들이 모여 완전한 개혁을 이루는 것이라 나는 믿는다. 인격은 실천이며, 불완전한 것들로 이루어진 완전함이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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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 18일 책읽기모임 발제문입니다. ^^



플러그를 꼽는 사람들


- '플러그를 뽑는 사람들' 발제글


모든 사회가 아미쉬 공동체와 같은 공동체 사회가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는 아미쉬 공동체는 지금과 같은 물질 문명의 사회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지금의 문명 안에서 보장된 하나의 탈출구는 될 수 있을지언정 미래 사회의 대안은 될 수 없다고 본다.

우선 근본적인 생태 관점에서 농업 역시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이며, 농업이 인간을 굶주림으로부터 해방시키기보다는 인간을 노동의 노예로 만들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수렵채취 시기 인간은 하루 4시간의 노동력으로 먹을 것을 해결했으며, 남는 시간을 지루하게 보내지 않기 위해 예술이 발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인류의 수가 자연이 주는 대로 먹고 살 정도로 충분히 적었기에 가능했던 시기이다.

농사는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하고 또 많은 아이를 먹이기 위해 땅을 개간해야 하는 생태파괴적 악순환이 되풀이 된다고 한다. 생태적인 관점에서 인간이 노동 집약적인 농사를 통해 공동체 사회를 유지하는 것보다는 한 사람 한 사람 각각이나 가족 단위의 소집단이 이동하며, 자연을 인공적으로 개간하지 않고 주어진 환경 내에서 먹을 것을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만일 아미쉬 공동체처럼 물질 문명의 기본인 전기를 사용하는 제품을 거부한다면 전기나 환경 파괴적인 에너지를 통해 만들어진 물건 역시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단지 현재의 물질 문명 안에서 자신들이 필요로 하고 선택한 친환경적(발재봉틀 등) 제품이나 마차 등의 친환경적 교통 수단을 사용한다고 해서 물질 문명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마차의 발명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지도 않고 더 문명화 된 교통 수단을 이용하지 않는 것은, 완전한 바느질이 아니라 발재봉틀을 이용하는 것은, 적당한 타협점을 찾는 것으로 어찌 보면 기회주의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들 수위의 문명 공동체 사회는 커다란 자연 재해를 받는 지역이 아닌 곳이기에, 국가가 그들의 사회를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닐까.

다양성을 지향하는 생태적 관점에서도 모든 사회가 아미쉬 같은 가족 제도나 공동체처럼 획일화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되며 공동체만 존재해서도 안 된다. 또한 인간의 다양한 창의성과 지적 호기심도 금지해서도 안 된다. 자신의 다양한 창의성을 바탕으로 한 예술성이 보장되듯이 과학이나 수학은 물론 인류학 등에 대한 지적인 탐구도 보장되어야 한다.

지금 세계는 달을 왕복할 수도 있으며 지구를 5개나 필요로 하는 미국 같은 나라가 있는가 하면 환경의 변화가 없는 곳에서는 아직도 구석기적인 삶을 살아가는 종족도 있다. 그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서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문명이란 어떤 것일까. 어느 것이 더 생태적인 삶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 모든 생명은 어느 한 순간에 머물러 있는 존재는 아닐 것이다. 모든 생명은 다양한 환경 변화에 적응하고 살아 남으려는 역동적인 존재인 것이다.

만일 아미쉬 공동체의 기회주의적(?) 방식이 아니라 양극단 즉, 생활방식은 수렵채취의 구석기적이면서도 첨단 과학을 이용할 줄 안다면, 인류는 가장 생태적이면서도 어떤 환경의 변화(빙하기나 운석 충돌 등)에도 계속 지구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인류가 물질 문명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발전시켜야 하는 이유는 인류가 종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이다. 물질 문명의 발전이 거꾸로 우리 생존을 위협하게 해서도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다시 플러그를 꼽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을 회복 불가능하게 파괴하면서까지 우리의 편리를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의 자정 능력 안에서 문명을 추구하며, 앞으로 다가올, 다가올지도 모르는 자연의 재앙으로부터 우리의 생존을 지켜나가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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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22일 책읽기모임 발제문입니다. ^^


거꾸로 은행


-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발제문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된다. 지금의 사회가 제대로 된 사회라면 그라민 은행은 그야말로 거꾸로 가는 은행이다. 그런데 만약 지금의 사회가 거꾸로 가는 사회라면 그라민 은행이야 말로 제대로 된 은행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란 개인의 노력보다는 사회적 구조에 의해 창출된다. 그 구조를 잘못 이용하게 된다면 자신의 노력(노동의 질과 시간)에 비해 수십 배에서 수백 배의 가치를 얻게 된다. 그것을 제로섬의 경제학에서 본다면 그만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노력의 가치에서 그만큼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노력 이상으로 얻은 가치는 사회적 구조에 의해 얻은 것이므로 당연히 사회에 환원해야 하나 지금의 사회는 오히려 개인의 자유 신장이라며 부당한 가치의 축척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거기다 부자들은 이렇게 얻은 부를 이용해 더 많은 부를 얻으려고 한다. 그것은 갖가지 착취 행위로 나타나게 된다.

  돈을 가진 사람들이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고리대금업이다. 당장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음식이나 의료 서비스 그리고 생필품을 구할 돈도 돈을 빌릴 곳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약점을 이용한 고리대금업은 가난을 더욱 가난 속으로 몰고 간다. 그래야 부자는 더 부자가 될 수 있으니까.

  은행에서조차 이렇게 무일푼의 가난한 사람들은 소외의 대상이며, 은행은 덜 가난한 사람들의 예금과 세금으로 부자들을 더 부자로 만들기 위해 안달이 난 것 같아 보인다. 왜 사회적 구조를 잘못 이용하려는 부도덕한 사람들을 은행은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믿는 것일까? 은행은 담보가 신용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담보가 곧 신용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부자들의 담보가 부도덕한 부의 축척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부도덕이 신용보다 중요하거나 부도덕이 곧 신용이라는 말인가?

  이러한 의미에서 그라민 은행은 자립할 의지와 계획이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립할 수 있는 최소한, 대출 가능한 최대한 지원해 주는 맨발로 뛰는 가난 구제 사업가라고 할 수 있다. 우습게도 우리가 그라민 은행을 칭찬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가난 구제 사업이 사회가 거꾸로 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라민 은행의 이러한 현실 안에 있기에 한계를 가지고 있다. 제로섬의 경제 안에서 극빈층의 자립을 대상으로 하는 비주류 경제 활동이라는 점이다. 자본가들이 극빈층의 자립 경제 활동이 자신들의 이익에 크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과연 그라민 은행이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 또한 아무리 가난한 사람들을 제대로 도운다고 해도 가난이 계속 재생산되는 사회에서는 2차적인 방법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근본적으로 가난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거꾸로 가는 사회에서 거꾸로 된 은행을 계속 만들고 확장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가는 사회를 거꾸로 돌리는 일이다. 어찌 되었건 그라민 은행이 단지 경제학이 대학 연구실에 머물러 있지 않고 행동하는 지식의 산물이라는 점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과 희망을 줬다는 점에 대해 우리는 유누스 총재에게 찬사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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