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주의(녹색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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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4.17 피로사회-요약

피로사회

- 한병철 지음/김태환 옮김/문학과 지성사 펴냄/2012.3.20

피로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다.”

 

피로사회

 

신경성 폭력

11~12p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따라서 타자의 부정성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12p

면역학적 행동의 본질은 공격과 방어이다. 아무런 적대적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타자도, 아무런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타자도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13p

사회는 오늘날 면역학적으로는 조직과 방어의 도식으로는 전체 파악을 할 수 없는 구도 속으로 점차 빠져들어 가고 있다. 이 새로운 구도는 이질성과 타자성의 소멸을 두드러진 특징으로 한다.

오늘날 이질성은 아무런 면역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되었다.

 

13~14p

면역학적 차원에서 차이란 같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차이에는 말하자면 격렬한 면역 반응을 촉진하는 가시가 빠져 있다. 타자성 역시 날카로움을 잃고 상투적인 소비주의로 전락한다. 낯선 것은 이국적인 것으로 변질되며, 여행하는 관광객의 향유 대상이 된다. 관광객, 또는 소비자는 더 이상 면역학적 주체가 아니다.

 

17p

21세기의 신경성 질환들 역시 그 나름의 변증법을 따르고 있지만, 그것은 부정성의 변증법이 아니라 긍정성의 변증법이다. 그러한 질환은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병리적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바로 이러한 긍정성의 폭력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것에 의존하여 사는 자는 같은 것으로 인해 죽는다.” 보드리야르는 현존하는 모든 시스템의 비만 상태를 지적하기도 한다.

 

18p

비면역학적 배척은 같은 것의 과다, 긍정성의 과잉과 관련이 있다. 여기에는 부정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또한 면역학적 내부 공간을 전제하는 배제도 아니다. 반면 면역학적 배척은 양적인 문제와 무관하게 일어난다. 그것은 타자의 부정성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18~19p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 저항이 아니라 소화 신경적 해소 내지 거부 반응으로 나타난다. 과다에 따른 소진, 피로, 질식 역시 면역 반응은 아니다.

 

20~21p

그러나 적대성의 계보학은 폭력의 계보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긍정성의 폭력은 적대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관용적이고 평화로운 사회에서 확산되며 그 때문에 바이러스성 폭력보다도 눈에 덜 띈다. 긍정성의 폭력이 깃드는 곳은 부정이 없는 동질적인 것의 공간, 적과 동지,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의 양극화가 일어나지 않는 공간이다.

세계의 긍정화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 새로운 폭력은 면역력적 타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내재적 성격으로 인해 면역 저항을 유발하지 않는 것이다. 심리적 경색으로 이어지는 신경성 폭력은 내재성의 테러이다.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22p

신경성 폭력은 시스템에 이질적인 부정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시스템적인 폭력, 시스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우울증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도 긍정성 과잉의 징후이다. 소진증후군은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에 따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다. 활동과잉에서 과잉은 면역학적 범주가 아니며, 다만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를 의미할 뿐이다.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23p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는 더 이상 오늘의 사회가 아니다.

 

21세기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24p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금지의 부정성이다.

성과사회는 점점 더 부정성에서 벗어난다. 점증되는 탈규제의 경향이 부정성을 폐기하고 있다.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예스 위 캔이라는 복수형 긍정은 이러한 사회의 긍정적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내준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26p

알랭 에랭베르는 우울증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규정한다. “우울증이라는 병은 권위적 강제와 금지를 통해 인간에게 사회 계급과 성별에 따른 역할을 부여하는 규율적 행위 조종의 모델이 만인에게 자기 주도적으로 될 것, 자기 자신이 될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규범으로 대체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 우울한 자는 컨디션이 완전히 정상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지쳐버리고 만다.”

 

26~27p

그는 성과사회에 내재하는 시스템의 폭력을 간과하고 이러한 폭력이 심리적 경색을 야기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성과를 향한 압박이 탈진 우울증을 초래한다. 그렇게 본다면 소진증후군은 탈진한 자아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다 타서 꺼져버린 탈진한 영혼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28p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 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다는 의식은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루어진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전쟁 상태에 있다.

 

28~29p

그 점에서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와 구별된다. 그러나 지배기구의 소멸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소멸의 결과는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깊은 심심함

30p

멀티태스킹은 후기근대의 노동 및 정보사회를 사는 인간만이 갖추고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퇴화라고 할 수 있다. 멀티태스킹은 수렵자유구역의 동물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습성이다.

 

32p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부른 바 있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장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장점이다. 단순한 분주함도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활동적 삶(vita activa)

40p

후기근대의 노동하는 동물은 노동을 통해 인류의 역병적 삶의 과정 속에서 용해되어버릴 만큼 자신의 개성이나 자아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노동사회는 개별화를 통해 성과사회, 활동사회로 변모했다. 후기근대의 노동하는 동물은 거의 찢어질 정도로 팽팽하게 자아로 무장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수동성과는 정말 거리가 먼 것이다.

 

44p

우울증,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나치 강제수용소의 무젤만(나치 수용소에서 영양실조로 피골이 상접한 수감자들)과 유사한 증상을 나타낸다. 무젤만은 탈진하여 완전히 무력해진 수감자들로서, 극심한 우울증 환자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무감각 상태에 빠져 심지어 육체적인 추위와 감독관의 명령조차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보는 법의 교육

49p

활동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기계는 잠시 멈출 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50p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

 

51p

예외 사태가 한계를 이탈하여 정상 상태가 되어간다는 그(아감벤)의 진단과는 반대로, 오늘날 사회의 전반적인 긍정화는 모든 예외 상태를 흡수해버린다. 그리하여 정상 상태가 전체를 지배하기에 이른다.

 

53p

무위의 부정성은 사색의 본질적 특성이기도 하다. 예컨대 참선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들이닥쳐 오는 것에서 스스로를 해방함으로써 무위의 순수한 부정성, 즉 공에 도달하려 한다. 그것은 극도로 능동적인 과정이며 수동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54p

역설적이게도 활동과잉은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형태의 행위로서 어떤 자유로운 행동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는다. 그것은 긍적적 힘의 일방적 절대화가 낳은 결과이다.

 

피로사회

65p

활동사회라고도 할 수 있는 성과사회는 서서히 도핑사회로 발전해 간다. 그 와중에 브레인 도핑처럼 부정적인 표현은 신경향상으로 대체된다. 도핑은 말하자면 성능 없는 성과를 가능하게 한다. 최근에는 어엿한 과학자들조차 그런 약물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무책임한 태도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외과의사가 신경향상제의 도움으로 좀 더 정신을 집중하면서 수술할 수 있다면 실수도 줄어들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미주

74p

미국의 면역학자 폴리 마칭어(Polly Matzinger)는 냉전시대의 낡은 면역학적 패러다임을 비판한다. 그녀의 면역학적 모델에 따르면 면역 시스템은 자아와 비자아, 나 자신과 타자를 구별하지 않는다. 면역 시스템에서 중요한 것은 우호적인 것과 위험한 것 사이의 구별이다.

 

74~75p

마칭어의 생각이 옳다면 생물학적 면역 시스템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믿어온 것보다 더 친절한 주인인 셈이다. 그것은 외국인 혐오증을 알지 못하며 외국인 혐오증을 보이는 인간 사회보다 더 현명하다. 외국인 혐오증은 자아의 발전에도 득이 될 것이 없는 병적으로 과도해진 면역 반응이다.

 

75p

니체가 말하는 최후의 인간은 건강을 여신으로 만든다.

사람들은 건강을 숭배한다. ‘우리는 행복을 발명했다.’ 최후의 인간들은 이렇게 말하고 눈을 깜빡거린다.”

 

본래 자유는 부정성과 결부되어 있는 개념이다. 자유는 언제나 면역학적 타자에서 나오는 자유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부정성이 과잉 긍정으로 대체됨에 따라 변증법적인 부정의 부정에서 유래하는 자유의 강조적 의미도 사라진다.

 

우울사회

 

81~82p

잘 알려진 것처럼 프로메테우스는 불과 함께 노동도 가져다주었다. 성과주체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지만 실은 프로메테우스처럼 묶여 있다. 끝없이 다시 자라나는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먹는 독수리는 성과주체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제2의 자아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프로메테우스와 독수리의 관계는 자가 착취의 관계인 셈이다. 피로란 스스로는 고통을 느낄 줄 모르는 간의 고통이라고들 한다. 따라서 착취의 주체인 프로메테우스는 엄청난 피로에 빠지고 말 것이다.

 

87~88p

나르시트는 경험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체험하고자 한다. 마주치는 모든 것 속에서 자기 자신을 체험하려 하는 것이다. () 그는 자아 속에서 익사한다. () 경험하는 인간은 타자와 마주한다. 경험은 이화적(ver-andernd)이다. 반면 체험은 자아를 타자 속으로, 세계 속으로 연장시킨다. 따라서 체험은 동화적(ver-gleichend)으로 작용한다. 자기애는 자기 부정성의 영향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아는 타자와 대립하는 가운데 나르시스트 그는 자아 속에서 익사한다. 세네트(Richard Sennett)

 

88p

자아는 타자와 대립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정립한다. 이로써 자아나 타자를 분리하는 경계선이 유진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타자와의 대립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는 것이다. 반면 나르시시즘에서는 타자와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나르시시즘적 장애를 겪는 사람은 자기 자신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리하여 타자 관계가 소실되고 이에 따라 안정된 자아의 이미지도 형성되지 못한다.

 

89p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이다. 객관적으로 유효한, 최종적으로 완성된 형식이 불가능하다는 사회적 조건이 주체를 자기 자신의 나르시스적 반복으로 몰아가고 있고, 그런 까닭에 주체는 하나의 형태, 안정적인 자아성, 확고한 성격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90p

히스테리는 정신분석학의 성립 배경을 이루는 규율사회의 전형적인 정신 질환이다. 히스테리는 심적 억압, 금지, 부인과 같이 무의식의 형성으로 이어지는 부정성을 전제한다.

 

91p

히스테리 환자가 이처럼 어떤 특정적 형태를 나타낸다면 우울증 환자는 무형적이다. 그는 성격 없는 인간이다. 더욱 일반화하여 말한다면 후기근대의 자아는 성격이 없다. 카를 슈미트는 진짜 적이 단 한 명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은 내적 분열의 신호라고 말한다. 이 말은 친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타당하다. 진정한 친구가 단 한 명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은 슈미트에 따르면 무성격과 무형태의 신호인 것이다.

 

92p

프로이트가 강조하는 것처럼 무의식과 심적 억압은 매우 커다란 상관성을 지닌다. 하지만 우울증, 소진증후군,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와 같은 오늘날의 정신 질환은 심적 억압이나 부인의 과정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 즉 부인이 아니라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무능함, 해서는 안 됨이 아니라 전부 할 수 있음에서 비롯한다. 그러므로 정신분석학으로 이런 병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울증은 초자아와 같은 지배 기관에서 오는 억압의 결과가 아니다. 우울증 환자에게는 억압된 심리적 내용을 간접적으로 암시해 줄 프로이트적 전이도 일어나지 않는다.

 

95p

새로운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기술도 타자를 향한 존재의 두께를 더욱 줄여 놓는다. 가상공간에서는 타자성과 타자의 저항성이 부족해진다. 가상공간에서 자아는 사실상 현실원리없이, 다시 말해 타자의 원리와 저항의 원리에 구애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 가상현실 속의 상상적 공간에서 나르시스적 주체가 마주하는 것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다.

 

96p

멜랑콜리는 어떤 상실의 체험 뒤에 온다. 따라서 멜랑콜리는 그나마 어떤 관계 속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부재하는 자아와의 부정적 관계가 멜랑콜리의 조건인 것이다. 하지만 우울증은 모든 관계와 유대에서 잘려나간 상태이다. 우울증에는 아무런 중력도 없다.

 

96~97p

소셜 네트워크 속의 친구들은 마치 상품처럼 전시된 자아에게 주의를 선사함으로써 자아 감정을 높여주는 소비자의 구실을 할 따름이다.

 

98p

우울증이 긍정성의 과잉에서 오는 것이라면, 멜랑콜리는 히스테리나 슬픔과 마찬가지로 부정성의 현상이다.

 

102p

복종적 주체가 초자아에게 예속된다면, 성과 주체는 자신을 이상 자아에게 기투한다. 예속과 기투는 상이한 두 가지 존재 양식이다. 초자아에게는 부정적 강제가 발생한다. 반면 이상 자아는 긍정적 강제력을 발휘한다. 초자아의 부정성은 자아의 자유를 제한하지만, 이상 자아를 향한 기투는 자유의 행위로 해석된다. 그러나 자아는 일단 도달 불가능한 이상 자아의 덫에 걸려들면 이상 자아로 인해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만다. 이때 현실의 자아와 이상 자아의 간주는 자학으로 이어진다.

* 기투(企投): project, 계획, 구상, 초고

 

103p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 주체는 완전히 타버릴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105p

호모 사케르는 신의 명령을 위반하여 공동체에서 추방당한 자를 말한다. 예턴대 경계석을 옮긴 자는 경계의 수호신인 유피테르 테르미누스의 보복의 손길에 내맡겨진다. 누구든지 처벌받지 않고 그를 살해할 수 있다.

 

110p

성과사회의 주권자는 자기 자신의 호모 사케르인 것이다. 성과사회에서도 주권자가 호모 사케르를 낳고 호모 사케르가 주권자를 낳는 역설적 논리가 성립한다.

 

113p

성과사회는 그 내적 논리에 따라 도핑사회로 발전한다. 단순한 생명 기능으로 환원된 삶은 무조건 건강하게 유지해야만 하는 삶이다.

 

역자 후기

128p

그러나 우울증의 배후에 놓인 성과사회의 압력은 단순한 외적 강제가 아니라 유혹의 형태를 취하여, 오직 인간 자신의 욕망을 매개로 해서만 관철된다. 따라서 성과사회의 압력은 끝없는 성공을 향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개개인의 반성과 자각을 통해서만 물리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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