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주의(녹색주의)


프라우트(PROUT: 최대활용)체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근본적 대안

 현재 국내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일련의 경제위기 현상들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부의 편중과 편중된 부의 투기화는 경제의 ‘거품화’를 초래하여 결국에 경제위기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자본주의는 그 속성상 부의 편중을 초래하며, 더욱이 신자유주의는 세계 자본시장을 완전 개방시킴으로써 투기의 기회를 확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제위기의 해결은 자본주의의 고질적인 병폐를 방지한다는, 보다 장기적이며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즉, 주기적인 공황의 원인인 부의 편중과 투기를 방지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제도의 내용은 자본주의 이념에 배치될 수밖에 없는 것이며, 동시에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었으나 이미 실패한 것으로 판명된 공산주의의 이념과도 다른 새로운 ‘대안제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존의 제도로써 문제해결이 어려울 때에는 기존의 사고의 틀을 뛰어넘는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나와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곤 하였다. 1930년대의 대공황이라는 극한 상황은,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는 케인즈의 경제이론을 받아들이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그후 지난 60여년간 케인즈의 이론은 자본주의사회의 경제정책을 주도하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또다시 시대가 바뀌어, 세계경제가 지나친 상호의존 속에 있어 개별국가의 재정 및 금융정책의 유효성이 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며 국제간의 조정도 어려운 상황으로 케인즈 식의 유효수요 관리정책이 한계에 봉착했다. 

  공산주의를 지양하면서 동시에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제도는 슈마허(E.F. Schumacher), 사카르(P.R. Sarkar), 바트라(Ravi Batra), 도운시(Guy Dauncey) 등에 의해서 개발되어왔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나타난 이들 이론들이 갖는 공통점은 부의 편중 억제, 최저생계의 보장, 협동조합 정신을 통한 자본과 노동의 협조적 협동, 지역공동체의 활성화 등이다. 특히 사카르는 대안제도로서, 경제를 포함한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였다. 그가 제시한 새로운 모델은 프라우트(PROUT = Progressive Utilization Theory, 진보적 활용론)라고 불리고 있으며, 미국 명문 SMU 대학의 바트라 교수에 의해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프라우트의 이념

  자본주의 이념은 개인의 물질적 성취동기를 자극함으로써 사회가 물질적인 측면에서 더욱 풍요로운 상태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질적인 면에서는 공산주의 이념보다 분명히 우월한 체제라고 할 수 있으며, 역사적인 사실로 증명되었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 강조되는 이윤 내지 효용의 극대화 동기는 개개인의 이기심에 기반을 둔 것이다. 즉, 자본주의는 물질중심의 사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개개인의 이기적 이윤동기를 자극하고 소유의 무한정한 자유를 인정함으로써, 장기적으로는 부의 필연적인 편중을 초래하며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공황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소유와 관련하여 일정한 규제장치를 마련하지 않게 될 경우, 사회 전체의 연대적 또는 총체적 복지를 결코 증진시킬 수 없는 것이다.

  프라우트는 개개인이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스스로의 복지를 최대한 증진시킬 수 있도록 하여, 물질적인 면에서 개인과 전체가 공동으로 진전하는 것을 목표로 한 제도이다. 사카르는, 공산주의는 물론 자본주의도 그들 이념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停滯性) 때문에 필연적으로 붕괴하게 된다고 강조하면서, 사회의 역동성을 유지시키는 것을 프라우트의 중요한 이념으로 설정하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정체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부의 극단적인 편중에 있으며, 공산주의의 경우에는 일당 독재와 근로동기의 저하로 인한 사회의 무기력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정체가 올 수밖에 없다는 면에서 양자는 같은 것이다. 프라우트에서는 사회의 정체를 야기시키는 이들 요인들을 합리적으로 지양하는 장치들을 상정하고 있다. 

  부와 소득의 편중은 비록 일부 ‘개인의 선’을 위해서는 더없이 좋을지 모르나,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의 ‘연대적 진보’를 저해하므로 ‘사회의 선’에는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개인과 사회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프라우트에서는 자본주의의 양대 지주를 그대로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역기능이 심화된 말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물질적 진보란 자본의 일방적인 노동착취의 결과로서 얻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본가와 노동자 또는 가진자와 못가진자 모두가 연대감을 갖고 상호간 발전적 자극을 통해 진보를 지향한 결과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프라우트 이론은 창조된 모든 것을 인류 전체의 공동재산으로 본다. 그런데 인류의 재산은 항상 제한되어 있으므로 개인들은 이 공동재산을 사용할 권한은 갖고 있으나 남용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소수에 의한 지나친 부의 축적은 다른 사회구성원들의 행복과 편의를 직접적으로 침해한다고 본다. 

  프라우트는 육체적 또는 물질적인 면에서 착취가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국가나 사회는 개인의 정신적 · 영적인 면, 즉 개인의 주관적인 삶의 발전을 저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회의 역할은 개인이 물질적인 면에서 전체의 이익을 저해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정신적 · 영적인 면에서는 무한성장을 하도록 도와야 한다. 공산주의는 이런 정신적 · 영적인 면의 중요성을 무시함으로써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프라우트는 위에서 언급된 바와 같은 원칙들을 구현하는 수단으로 다음과 같은 제도를 제시하고 있다.

  부의 집중 제한과 최저생계의 보장

  프라우트에서는 연대감과 동기부여를 통해 사회와 개인의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우선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적어도 최저수준의 삶을 보장할 것, 아울러 근로동기를 유발하기 위해 기여도에 따라 분배의 차이를 둘 것을 제안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사회의 활력을 높여 그 사회가 역동적으로 진보할 수 있도록 부와 소득의 상한선을 설정하는 한편, 최저수준을 끊임없이 상향조정하여 구성원간의 분배의 차이를 점차 줄여나가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의, 식, 주, 의료, 교육 등의 최저수준이 보장되도록 그것들을 분배하여야 하며, 최저생계수준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상향 조정되어야 한다.

  모든 사회구성원에게는 최저생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을 살 수 있는 구매력을 제공해야 하며, 그 구매력이란 노동의 기회와 노동의 대가를 적절히 보장 받는 방법으로서 이루어져야 한다. 즉, 노동이 가능한 모든 사람에게는 노동의 기회를 주고, 노동으로부터 얻는 수입은 적어도 최저생계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증 장애인이나 고령자와 같이 노동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최저생계에 필요한 현물과 현금을 노동 여부에 관계없이 직접 제공해야 한다. 이처럼 노동에 대한 대가로 최소한으로 삶의 최저수준에 맞는 임금을 지불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거지근성’이 사회에 스며들어 게으른 사회가 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정부에서는 매년 최저생계수준을 책정하여야 하며, 그에 맞게 최저임금을 책정해야 한다. 또한 최고임금과의 격차가 지나치게 커지지 않도록 최저임금을 매년 상향조정하는 동시에 최고임금에 대한 적절한 통제가 필요하다. 능력과 기여도가 큰 사람에게 높은 임금으로 보상해줌으로써 사회구성원들의 근면성과 창조성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나친 임금격차가 가져오는 부작용을 피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 부작용은 결국에 경제공황, 사회 연대감의 와해 등의 양상으로 모두에게 돌아가게 되므로, 높은 임금을 받던 사람도 부작용의 영향에서 예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능력이나 기여도가 큰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사회에 봉사 ·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더욱 넓혀주는 방향으로 인센티브를 제공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임금상한선을 정했다고 해서, 일에 대한 인센티브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근면성이나 창조성은 돈에 대한 욕구보다는 그 사람의 성품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사람의 성품은 타인에게 봉사하고 높은 이상을 추구할 때 더욱 연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라우트에서는 부의 편중을 막는 것을 임금격차를 줄이는 것보다도 더 중시한다. 부의 편중은 소득의 불평등을 초래하며, 경제공황의 주범이기도 하다. 따라서 부의 축적은 엄격히 통제되어야 하며, 부에서 발생하는 소득, 즉 재산소득도 임금소득과 마찬가지로 통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불구자나 노인, 미망인 등과 같이 근로활동의 제약을 받아 임금수입이 적거나 없는 사람들은 적절한 예외적 조정이 필요하다.

  프라우트의 고용정책은 특히 완전고용을 최우선으로 한다. (생산시설 및 경제력의 일부지역 집중과 농업부문의 지나친 위축은 완전고용을 저해하는 주요한 요인이 된다.) 앞에서도 강조했지만 프라우트에서는 모든 사회구성원의 최저생계 보장을, 일차적으로 고용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으므로, 완전고용과 최저생계수준의 유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한편 프라우트는 생산시설의 자동화 및 기계화를 적극적으로 유도한다. 자동화나 기술발전으로 노동에 소요되는 시간이 줄어들게 되면, 노동시간은 줄이되 고용수준은 줄지 않도록 하여, 여유시간을 정신적 · 영적인 추구에 활용토록 한다. 이윤극대화가 목표인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는 생산이 자동화될수록 실업이 늘어나고, 실업자는 ‘사회문제를 야기시키는 사람들’로 전락할 수 있다. 그러나 프라우트에서는 이윤이 아닌 ‘공동복지’와 모든 구성원의 최저생계 보장을 일차적인 목표로 추구하므로, 생산이 자동화되더라도 고용수준은 그대로 유지된다. 또한 자동화로 인하여 발생할 수 있는 수익이 자동화에 투자된 자본의 원리금 부담을 상회할 경우에는, 전보다 적은 시간을 일하면서도 오히려 더 많은 임금소득을 올릴 수 있게 된다.

  최저생계 유지를 위해 배분하고 남은 것은, 사회에 대한 개개인의 기여도에 따라 분배해야 한다. 사람들은 모두 나름의 재능이 있으며, 사회에 대한 기여도도 각각 다르다. 따라서 사회를 위해 더 많은 기여를 한 사람에게는, 그가 앞으로 더 많은 봉사를 할 수 있도록, 그의 기여도에 맞게 부를 더 배분해주어야 한다. 공산주의에서 내세운 “능력에 따라 봉사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간다”는 말은 귀에는 달콤하게 들리나, 현실성이 없는 공허한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보통사람들’ 또는 사회 취약계층의 생활수준의 향상은 그 사회가 얼마나 역동적인지를 나타내주는 척도이다. 그러므로 사회에 대한 기여도가 많은 사람들은 분명히 최저생계수준보다 높은 물질적 편의를 제공받아야 하지만, 동시에 최저생계수준을 높이기 위한 노력도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한다.
 
 경제력의 지방분산과 경제의 민주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비용극소화와 매출극대화를 통한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과소비의 조장은 물론 생산시설의 일부지역 집중이 발생하게 되어, 지역간 발전의 불균형과 소득의 불균형이 일어난다. 또한 인구의 도시집중 등 여러가지 사회 · 경제적 문제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특히 생산시설의 일부지역 집중은 노동착취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프라우트는 지방분산을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상정하고 있다. 경제의 민주화란 모든 사람에게 ‘경제적 기회’를 균등하게 보장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경제의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경제력을 지역주민들에게 분산시켜야 한다고 보는 것이 프라우트의 관점이다. 그리고 경제의 민주화에는 부가 개인에게 집중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또한 지역경제에 대한 외부의 영향을 배제하여, 그 지역의 자본이나 부의 유출을 방지해야 한다. (경제력을 지역으로 분산하고 주민의 손에 의해 생산, 판매, 분배가 이루어지게 되면, 생산이 소비목적 위주로 이루어지면서 지역내에서의 가격안정, 낭비 및 과소비 근절 등과 같은 다양한 혜택이 발생한다.) 

  또한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원자재를 이용할 수 있는 산업을 개발하여 지역주민의 고용을 극대화해야 하며, 원자재의 외부판매는 완전고용 상태에서 사용될 수 있는 양을 초과하여 보유할 경우에만 허용하도록 한다. 원자재를 이용하는 지역경제 발전전략을 추구할 경우, 노동력의 유출입이 적어 지역사회가 안정된다. 이처럼 프라우트는 지역의 부존자원을 활용하여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것을 특히 강조하였다.

  다른 지역과의 소득격차가 없어지게 되면 여러가지 ‘지역 컴플렉스’가 사라지게 될 것이며, 상호배타적인 감정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같은 지역간의 심리적 균형은 사회발전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이윤이 아닌 소비를 위한 생산체제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프라우트 이론에서 생산의 목적은 이윤이 아니다. 대신, 개인들이 필요로 하는 물질을 적당하게 공급함으로써 그들이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키면서, 정신적 · 영적인 차원을 확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생산의 목적을 이윤극대화가 아닌 소비수요의 충족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소비를 목적으로 하는 생산체제’로서 프라우트는 피라미드형 구조를 제시하고 있다. 즉 피라미드의 맨아래 부분은 공공영역,  그 위가 협동영역,  맨위가 소규모영역 순으로 구성된 산업구조인 것이다. 

  공공영역은 다른 영역의 기초가 되는 가장 중요한 분야로, 동력자원, 중화학, 교통통신, 국방 등과 같은 사회 기간산업이다. 이 분야는 사회 전체의 복지에 큰 영향을 미치므로 국가의 관할 아래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운영은 정부로부터 독립된 공적인 조직에서 맡아야 한다. 수익성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되며 비용을 보상하는 수준에서 가격이 책정되어야 한다. 이 분야는 여타 산업의 비용구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환경오염의 가능성이 매우 높은 분야이므로 특별히 유의해야 한다. 그런 이유로 지금과 같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공기업의 민영화는 많은 경우에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협동영역은 대규모 소비재산업, 경공업, 대규모 농업을 포함하며 해당지역의 주민들이 협동조합 방식으로 경영과 노동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조합원들 스스로 목적을 설정하고 토론과 대화를 통하여 경영을 하는 것이다. 협동조합 방식의 운영은 이윤의 합리적 분배를 통해 부의 편중을 예방할 수 있으며, 조합원 스스로가 동시에 소비자가 되므로 제품가격이 저렴하며 안정적이 된다. 조합원은 투자한 자본과 근로 기여도에 따라서 배당과 임금을 받는다. 근로와 자본 주체간의 ‘종속적 협동’이 아닌 ‘협조적 협동’ 속에서 생산, 판매, 분배가 이루어지도록 함으로써, 자본주의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던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상호배타적 이익추구로 인한 갈등을 불식시킨다. 협동영역에 있어서의 운영은 투자를 많이 한 사람들이 아니라 조합원의 민주적 투표로 당선된 이사회에서 맡는다. 그리고 강력한 관리체제를 유지하고, 주민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지역중심의 경제단위를 구축하는 것이다. 기존의 협동조합의 실패는 이러한 ‘풀뿌리’ 협동조합의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한 결과라고 본다. 

  소규모영역은 소규모의 협동조합, 개인사업, 동업, 개인농업을 대상으로 한다. 개인들의 창의성과 생산성을 보장하여 근로 또는 사업의 동기를 부여한다. 이 분야는 주로 상업과 개인서비스 사업으로서, 자유경쟁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분야이다. 그리고 자유경쟁이 이루어지므로 자원은 최적배분이 되며 이윤도 ‘정상’이윤에 그쳐 프라우트의 원리인 ‘소비를 위한 생산’에 어긋나지 않는다.
  한편 프라우트에서는 농업부문을 특히 중시한다. 많은 국가들이 비교우위 이론에 따라 제조업분야에 치중함으로써 농업부문이 위축되어 산업의 불균형이 초래되고 지역공동체가 약화되었다. 산업의 불균형은 사회정서의 불균형을 초래하고, 이것은 다시 사회의 모든 측면을 타락, 파괴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사회의 몰락을 가져오게 된다. 농업부문이란 단순히 농업만이 아니라, 농기계와 농산품가공 등 농업관련 산업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광의의 농업부문은 고용증진 효과가 크고 불황에도 비교적 영향을 덜 받으므로, 한 사회가 실업과 경기침체에 대해 강한 내성을 갖게 하는 데 큰 기여를 한다.

  토지의 궁극적인 공동소유

  프라우트에서는 농업부문의 활성화를 위한 선결요건으로서 토지의 공개념화, 즉 토지는 점진적으로 지역의 풀뿌리 협동조합의 공동소유로 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와 같은 토지의 공동소유 개념은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며, 이미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다. 안승준은 지역경제의 구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건은 토지와 그 토지에 부수되는 자연자원의 공유라고 보았다(국가에서 공동체로, 환경운동연합 출판국, 1995). 그는 공동체와 그 구성원의 부는 토지 자체와 그 토지에서 산출되는 것이라고 보았는데, 토지가 지역공동체의 공동소유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토지의 생성근거(존재가치)와 토지가 생산물의 형태로 만들어내는 부가가치(토지의 활용 내지 효용가치)의 근원에서 찾고 있다. 

  그는, 토지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가치, 즉 존재가치는 인간이 창조한 것이 아니어서 어떤 개인의 사적인 소유재산으로 인정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으며, 토지가 창출해내는 부가가치는 그 토지를 활용하는 사람들의 노력의 결과이므로, 토지에 살지 않거나 토지를 실질적으로 활용하지 않는 외부인의 소유로 하는 것은 잘못된 사고라고 보았다. 안승준은 이와 같은 ‘지역공동체에 의한 토지소유’라는 개념에 바탕를 둔 ‘공동체 토지신탁’ 제도를 지역공동체를 성립할 수 있는 기본적인 요건으로 보았으며, 나아가서 생태친화적인 사회의 기반 조성에도 핵심적 기여를 할 것으로 보았다. 이 제도에서는 어떤 개인도 토지를 소유할 수 없고, 공동체 토지신탁만이 토지를 소유하며, 공동체내의 개인들에게는 그 토지의 사용권을 인정해준다. 이와 같은 방식의 토지소유 및 이용 제도는 ‘용익권(用益權)의 관행’이라는 오래된 법적 개념에 근거한 것이다. 이와 같은 용익권은, 토지를 공동체의 공익을 위해 공동소유로 하면서도, 일정한 민주적인 통제방식 하에서 개인들이 그 토지를 활용할 수 있게 해주고자 하는 취지에서 형성된 개념이다. 

  이 제도는 여러가지 긍정적인 효과를 낳는다. 투기를 목적으로 한 토지 취득이나 개발의 여지가 없으므로, 공동체에 의한 토지확보가 용이하여 공동체의 장기적인 확대발전이 가능하다. 외부인에 의한 토지관련 착취로부터 공동체 구성원들이 보호되며, 공동체 의식이 강화된다. 그리고 토지가 없거나 소득이 적은 영농 희망자에게 장기적으로 토지를 경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이들에게 경제적 안정을 제공할 수 있다. 특히 이 제도는, 경제적 위기가 도래할 때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계층에게는 생존문제의 해결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토지소유의 집중 및 부재지주의 토지소유를 실질적으로 배제하여, 지역주민의 토지사용 지분이 좀더 균등해지도록 한다. 또한 장기적으로 생태적인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는 여지를 키우며, 공동체 정신의 함양으로, 협업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유기농업을 확산시킬 수 있다. 나아가 생산자협동조합의 형성 및 도시지역 소비자협동조합과의 연계를 통해, 시장경제로 인한 가격과 수급의 불안 및 농산물 배분상의 비효율성 등을 극복할 수 있다. 두레와 같은 생활공동체적 협업의 관행이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고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지역내 상호신용금고와 같은 금융기관을 성공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가능성도 커진다. 이러한 기관이 주민들의 풀뿌리 조직으로 구성된다는 것은, 지역내에서 부가 창출되고, 그 창출된 부가 외부로 유출되지 않고 다시 부를 재창출하는 데 사용된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공동체 의식의 강화로 풀뿌리 민주주의의 기반을 형성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안승준의 생각은 사카르가 주장한 프라우트 이론에서의 토지개념 및 소유권 귀속 입장과 매우 유사하다. 사카르는 자본의 유출을 방지하는 것과 외부자본이 이윤획득 목적으로 지역에 진입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도 지역경제의 활성화 내지 외부자본에 의한 지역경제 착취를 방지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또한 지역의 인적 자원, 특히 지식과 기술인력의 지역내 거주와 경제활동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런 점에서 사카르는 지역경제 활성화에 필요한 요소를 토지뿐만 아니라, 자본 그리고 인력까지를 포괄하는 보다 광범위한 관점을 제시하였고 할 수 있다.
 프라우트의 정치체제

  사회를 지배하는 계층이 다른 계층을 착취하지 않는 경우에만 민주주의는 제대로 장점을 발휘할 수 있다. 또한 모든 사람에게 최저생계수준이 보장되지 않을 경우, 민주주의에서 인정하는 ‘평등한 선거권’은 별 의미가 없게 된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중의 교육이 전제되어야 한다. 여기서의 교육이란 단순한 정보의 전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로 하여금 사회 · 경제 · 정치 의식을 기르게 하며,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온갖 좁은 ‘이기주의’의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분별력을 키워주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부도덕하고 부패한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성공할 수 없으므로, 국민들의 도덕성을 고양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정당정치는 사람들 사이의 분열을 조장할 뿐만 아니라, ‘정치꾼’들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기득권층을 형성시켜, 양심적이고 유능한 새로운 인물의 성장을 어렵게 한다. 프라우트는 정당이 없는 민주주의 제도를 지지하며, 사회에 대한 봉사를 목적으로 하는 도덕성을 지닌 유능한 사람들이 사회를 이끌어가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취지에서 프라우트는 전혀 새로운 ‘이원적인 민주적 정치제도’를 제시하고 있다. 국가의 관리는 지금과 같은 입법, 사법, 행정 등의 국가기관과 공무원이 담당하도록 하며, 이 정부기관과 국민들을 연결하는 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이다. 즉, 이 위원회는 마을단위부터 국가단위까지 구성되며, 직접적으로 행정을 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민들의 의사를 수용하고 정부의 활동을 감독한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은 무엇보다도, 육체적 또는 물질적인 면에서는 개인이 타인이나 사회를 착취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동시에 누구나 물질적 최저생계수준은 보장받도록 하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물질적 조건은 궁극적으로 ‘차원 높은’ 복지사회를 구현하는 전 단계로서의 소위 ‘경우바른’ 사회가 달성해야 할 필수사항이기도 하며, 우리들 누구나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프라우트는 이러한 사상을 전제로 한 것이다.

PROUT -- A VISION FOR ALL LIVING BEINGS
자료 : 아난다마르가-명상, 요가, 채식주의(http://anandamargak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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