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고 싶다
- 지율스님의 산막일지/지율 지음/(주)사계절출판사 펴냄/2017.1.16
지율스님 하면 사람들은 100일 단식, 도롱뇽 소송, 천성산을 떠올릴 것이다. 승려보다는 투사로서의 이미지가 더 강하다. 지율스님과 함께 생활해 보지 않고서는 승려로서의 모습, 아니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나도 도롱뇽 소송 때까지만 해도 지율스님을 멀리서만 봐 왔기 때문에 스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지율스님과 내가 가깝게 인연을 맺은 것은 스님이 4대강 공사 착공 이후 산을 내려온 이후부터이기에.
자연을 이용의 대상 한 가지로만 보는 사람이 있듯이 사람에 대해서도 잘 알려진 한 가지 면으로만 그 사람 전체를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부분이 훨씬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산막일지는 사람들이 지율스님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을 깨 주고,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방식과 자연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돌이켜보게 한다. 산막일지는 지율스님이 도롱뇽 소송 이후 4대강 공사 착공 전 영덕 산골 오지에 살면서 1월부터 12월까지의 농사일을 중심으로 스님과 마을 사람들의 삶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책이다. 지율스님은 이 책을 쓴 이유를 “지난 이 년 동안 천성산을 떠나 이 오지에 틀어박혀 살면서 산막일지를 쓰는 것은 땅이 죽어가고 있는 절박한 상황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승려로서의 지율스님과 인간으로서의 지율스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아직도 70~80년대 시골 모습을 간직한 공동체가 살아 있는 마을의 정겨운 모습을 보여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본다. 또 100일 단식으로 피폐해진 지율스님의 몸과 마음이 농사와 공동체 삶을 물과 거름 삼아 다시 회복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각박한 성장 위주의 경쟁사회에서 몸과 마음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에게 치유가 되고 삶의 방식에 전환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혹시 이 책으로 인해 이 산골 오지 마을이 관광화되지 않을까 괜한 걱정을 해 본다.
지율스님은 묵밭을 일구며 “처음에는 그저 일을 하고 불편을 감수하면서 그동안 너무나 쉽게 살아진 내 삶을 돌아보겠다고 여유롭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일이 나를 돌보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일이 나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얽매이게 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진짜 일이란 나를 돌보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흔히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는 오류를 저지르곤 한다. 지율스님은 “고속철도 2단계 구간 130킬로미터의 환경영향평가서에서는 도롱뇽은 물론 보호해야 할 ‘단 한 종’도 살지 않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들이 ‘보려 하지 않았던 것들을 보여주고 싶었던 일’이 ‘도롱뇽밖에 보지 못하는 감성적인 비구니’로 매도되기도 했지만 나는 그들의 선택과 내 선택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고 싶어 하고 무엇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일까? 그 선택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지율스님은 사람이 던져 준 먹이에 길들어 가는 독수리처럼 우리도 야생성을 잃고 무엇엔가에 길들어 가고 있다고 했다.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에 깃들여 사는 인간이 환경과 자연의 순리를 파괴한 대가로 얻은 성장과 편리에 길들어져 과연 언제까지 생존해 갈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입춘 추위는 꿔서라도 한다 했다. 계절의 순리를 들어 세상의 순리를 비추고 세상의 순리를 들어 엎치락뒤치락 인간사 ‘새옹지마’다.”라고 했듯이.
나도 어렸을 때는 부끄러움이 과다 분비되어 있었지만 지율스님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부끄러움도 나이를 먹어 늙는지 요즘은 거리에 나가 광대 춤을 추어도 내 흥이라고 거드럭거릴 지경이다. 그러기에 나이 오십이 넘으면 세 치 되는 가시가 목에 걸리지 않는다고들 하나 보다.” 그게 세월의 이치이고 자연의 순리인가 보다.
지율스님은 당뇨병으로 시각을 잃은 자야 아재가 풀을 벨 때 호미질과 낫질 하는 손을 유심히 보고서는 자야 아재의 눈은 보는 데 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보려 하지만 자야 아재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눈을 감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우리 삶의 본질이 아닐까? 우리는 너무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 살고 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옥이 할아버지는 삼십 년 전 약주를 끊었으나 부모님 산소에 상석을 세우기 위해 읍에 다녀오면서 약주를 했다.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음에도 취중에 지율스님 앞에서 “이렇게 외로울 수 있나, 이렇게 외로울 수 있나”하며 몇 번을 반복했는데, 그 외로움은 기댈 부모님이 없고 명절 때 오지 않은 큰아들 때문에 서운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 촌구석에서 자식 오남매 키우고 공부 시키느라고 나는 내 인생도 한번 살아보지 못했어. 그런데도 생각해보면 그때가 사는 것 같았어.” 자식을 생각하고 헌신하는 부모님 마음 누군들 다를까. 우리는 너무 자신의 인생만을 위해 살아가고 그게 정답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게 세상의 순리가 맞을까?
오지 마을에서 평소엔 조용한 분들이 술과 떡국을 먹고 흥이 날 때는 “놀 때는 열여덟 살, 일할 때는 팔십 노인네”라고 한다. 나는 술을 먹지 않고 흥을 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나도 그곳에 살고 그 나이가 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오락거리가 넘치는 도시 생활에서야 굳이 그렇게 말할 필요도 없지만 한적한 오지 마을에서 그런 낙이라도 없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35년 동안 이장을 하고 남은 것은 문간에 걸려 있는 스무 개 남짓한 모자가 전부인 이장님이 인수인계를 하던 날 일지(날마다 한 장씩 뜯는 달력에 쓴)의 한 페이지에는 “고생도 많이 하였으며 술값도 많이 써였음”이라는 한마디로 소감을 표현하였다. 일지를 쓸 때 이장님의 마음은 그 한 문장만큼 단순했을까?
지율스님은 농사밖에 모르는 할머니들이 곱게 화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의아해했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 화장으로 덮으려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자신을 가꾸는 것을 예의라고 생각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할머니들이 짙게 화장을 하고 화장 냄새를 피우는 것을 거북해 했는데 앞으로는 그 예의에 예의로 대해야겠다.
자식 자랑하는 할머니들이 지율스님에게 그런 자식 하나도 없지 않느냐고 하자 스님은 “할매는 배 아프고 낳은 자식이 겨우 다섯이지만 나는 배도 안 아프고 수백이여, 그래서 부처님 자식이라고 불자(佛子)라고 하는 것 아녀?”라며 “할매는 나이 어린 자식들만 있지만 난 나이 많은 자식도 있잖은가?” 하고 대답한다. 할머니들이 “아이구, 우리 스님 말씀도 잘하셔!”, “그러게, 스님이 오시고 우리 마을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니까!”라고 하니까 지율스님은 “당연하지, 나 때문에 평균 연령이 많이 낮아졌으니까!” 하고 대답한다. 할매들, 지율스님 말씀 잘하시는 것 이제야 아셨나요?
오지 마을에서는 일 년에 두 번 풀베기를 한다. 휴가철을 앞두고 한 번, 추석 전에 한 번 십리 길을 자식들을 위해 하는데 “‘속까지 빼앗겨도 밉지 않은 도둑’이라고 그 도둑은 구부러진 허리를 더욱 구부러지게 하고 주름진 손을 더욱 거칠게 만들지만 그래도 풀을 베고 기다림 하게 한다.”고 지율스님은 말한다. 세상에 가족만큼 그립고 강한 공동체가 있을까? 사고로 한쪽 팔을 절단하게 된 호영이네 부친상으로 온 가족이 모였는데 지율스님의 눈에 고인이 된 할배와 할매의 이십 년 전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큰아들은 내 시선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사진 속의 호영이를 가리키며 “엄마, 이 사진 속에는 호영이 팔이 있어….” 하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나도 따라 울었고, 집으로 넘어오는 길에서도 계속 눈물이 흘렀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사람만이 아니다. “정택이 아저씨네 송아지가 팔려 간 모양이다. 새끼가 팔려 가면 어미는 근 열흘 정도는 여물도 먹지 않고 운다. 새끼를 잃고 우는 어미 소의 울음은 ‘소리’가 아니라 창자를 훑어내는 소리다.” 짐승도 그러하거늘 시골에 계신 어르신들의 자식 생각은 오죽할까.
공동체는 가족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이웃에서 마을로 확대된다. 사람만이 아니라 항상 관계하고 있는 가축이나 농작물 그리고 산과 들, 강 모두가 공동체다. 가족 공동체가 없이 마을 공동체, 사회 공동체가 가능할까? 지율스님이 말하는 ‘땅이 죽어가는 이 절박한 상황’은 가족 공동체의 붕괴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 해결은 가족 공동체의 회복에 답이 있지 않을까?
지율스님은 사람들이 집에 찾아오는 것을 꺼린다. 나도 아직 닷새에 한 번 버스가 들어가고 11가구 23명이 사는 소박한 이 오지 마을에 아직 가보지 못했다. 그래서 신호 어르신, 이장님, 나무 할배와 나무 할매, 자야 아재, 옥이 할아버지, 호영이, 병아리와 송아지, 똥장군, 두엄, 지게, 이 모든 것들이 더욱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