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주의(녹색주의)

채식 운동의 한계

초록 사회 l 2013. 7. 24. 16:18

어쩌면 나는 20여 년 지켜 온 채식을 포기하고 육식을 다시 시작할지도 모른다.
나는 인간에 대한 신뢰감을 점점 잃어가고 있으며, 이제 내 자신에 대해서도 굳이 스스로 인간임을 자부하며 존엄스럽게 살기를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니...

혹시 당신은 죽어가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을 그냥 구경만 하고 있던 적이 있는가? 나는 그 경우에 말 그대로 방관만 하고 있었다.

몇 년 전이었다. 내가 홍천에서 일하고 있었을 때였다. 내가 일하고 있던 곳 바로 앞에는 홍천강이 있었는데 갑자기 웅성거리며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었다. 나도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가 보았다. 강물이 급하게 흐르는 곳에 한 남자가 떠밀려 내려가고 있었다. 물에 가라앉았다 떴다 하는 와중에도 그는 갖가지 욕을 하며 자신은 수영을 못하니 구해 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구경만 하고 있었고 한 남자가 래프팅 보트를 타고 구하러 가고 있었다.
그런데 보트가 커서 혼자 한쪽에서 노를 젓느라 보트는 뱅뱅 돌기만 하고 중간쯤에서 잘 나아가지 않았다. 그가 조금만 침착해 한 사람을 더 태우고 갔더라면 아마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언덕 위에 있던 나는 뛰어들어가 사람을 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면서
수영을 잘한다는 형이 어디 있나 살펴보았다. 그 형은 보트가 떠 있는 물가 쪽에 있었다. 그런데 그 형도 다른 사람처럼 구경만 하고 있었다. 물살이 무척 빨랐으므로 아무도 맨몸으로 물에 뛰어들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일 뛰어든다면 그것은 바로 자살 행위나 다름 없었다. 비록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이라할지라도.

그때 구해 달라고 소리만 치던 두 남자가 작은 바나나 보트를 타고 노도 없이 그를 구하러 간다고 뛰어 들었다. 그들은 물에 빠진 남자의 친구로 보였다. 하지만 작은 바나나보트에 억지로 매달려 타고 내려가는 그들의 행동은 무척 위태로워 보였다. 그들은 바나나 보트에서 떨어질 것 같자 수영을 못한다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그들도 먼저 물에 빠진 친구와 같이 물에 떠내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먼저 물에 빠진 남자는 결국 가라앉고 말았지만 다행히 래프팅 보트가 이미 아래쪽에 와 있던 관계로 친구를 구하러 간 두 남자는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그날 나는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을 무기력하게 바라만 보고 있던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자살 행위를 범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변명으로 스스로를 위로할 뿐이었다. 그런데 물에 빠진 사람이 만일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라면 나는 과연 어떻게 행동했을까. 구경만 하고 있던 사람들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물에 빠졌다면 과연 어떻게 행동했을까. 친구를 구하러 간 두 사람처럼 어릭석은(?) 행동을 했을까...

그리고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상을 살면서 위대한 삶을 사는 것도 좋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아니 한 생명이라도 죽어가는 목숨을 살리면 자신의 인생은 충분히 값진 것이 아닐까. 우리가 동물인 이상 우리의 삶은 수많은 생명의 희생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희생되는 생명 이상의 생명을 살리는 삶을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아직까지 우리는 문명이라는 것을 믿고 있는가? 이성이라는 것을, 도덕성이라는 것을 믿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위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이라크 전쟁은 물론 최근까지 인간에 의한 대량학살은 계속 자행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또 그럴 것이다. 바로 우리가 그 일이 전혀 우리와는 별개인 일인 것처럼 방관하고 있을 때 우리의 이웃은 우리의 다른 이웃을,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몰살하려고 할 것이다. 캄보디아에서, 이라크에서, 르완다에서, 보스니아에서, 아프카니스탄에서 인종청소가 일어나고 있을 때, 자신이 살기 위해서 이웃을 보호해 주기는 커녕 자신의 친척까지 고발할 수밖에 없었을 때, 어떤 동물도 따라갈 수 없는 잔인함으로 시체에까지 폭력을 가해지고 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이성을 잃고 집단적인 광란에 휘말려 있을 때, 그들의 이웃나라에서는, 세계의 리더라는 미국에서는, 한국에서는 그것을 막기 위해 어떤 일을 했는가.

우리의 이해와 직접적으로 관계된 일이 아니기에, 우리에게 피해가 올지도 모르기에 우리는 방관하고 있지 않았는가. 우리가 국가가 잘못하고 있는 일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면 우리가 국가의 잘못에 동조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을까. 내가 직접한 일이 아니므로, 내가 직접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내 의지와는 관계가 없으므로 우리에게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일 지역 감정이라는 것이 극대화되어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대량학살하게 되었고 당신이 어느 쪽이든 소속되었을 때, 당신의 가족이 가해자가 되었을 때, 당신은 장담할 수 있는가 당신의 목숨을 담보로 가족의 잘못을 비판하고 그들의 행동을 막으려 할 것이라고.

나는 솔직히 대부분의 사람을 믿을 수 없다. 그런 일을 생각할 때 끓어 오르는 나의 분노를 보면서 어쩌면 내 자신도 그들과 똑같은 인간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만일 내 아버지가 나찌당의 열렬한 옹호자로 나서서 홀로코스트를 자행하고 있고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과연 나는 내 아버지의 일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까. 그로 인하여 내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는?

나는 생명, 특히 동물의 생명을 인간의 것과 다르지 않다는 관점에서 채식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분명 채식 운동을 하는 나는 최소한 사육되는 동물에 대해 인간의 대량학살에 반대하듯 그들의 생존권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가족에게조차 육식을 저지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안하고 있다. 가족간의 불화가 무서워서, 사람들이 나를 거북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 두려워서, 사회로부터 소외될지도 몰라서, 바로 내 자신을 위해서 나는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생명에 대해, 동물의 생존권에 대해 나는 부끄럽게도 적당히 그 소중함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모든 생명은 다 같이 소중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을, 이웃보다 내 가족이 더 소중히 생각하듯 동물보다도 지구의 재앙이라고 할 수 있는 인류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간의 목숨에 비해 다른 동물의 목숨을 하찮게 생각하고 다른 적대적인 인종이나 종교인들의 목숨을 하찮게 생각하고 동물이나 다른 인종에 대해 잔인한 폭력으로 생명을 빼앗아 갈 때, 가해자가 나와 가까운 사람일 때, 그들의 행위를 저지할 때 나까지 피해자가 될 수 있을 때, 과연 나는 그들을 저지할 용기가 있을까. 지금의 내 실천력으로 보아 나는 그런 용기도 없는 비굴한 인간임이 자명하다.

자유언론이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어떤 형태의 권력 앞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장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모든 개인이 자유언론인이 되었을 때 진정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나는 감히 불완전한 실천으로 완전한 사회를 외치고 있다. 분명 사람들에게 완전한 사회를 이룰 것을 요구할 자격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나 나는 분명 외쳐야만 하는 것이다. 누군가 완전한 실천가가 나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우리에게 잠재된 폭력성과 대량학살의 두려움으로부터 나를 그리고 우리 자신을 구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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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06년 경에 쓴 글이다. 이후 변화가 있다면 좀더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것과 장기와 시신을 기증하고 매번 헌혈을 계속하여 현재 30번이 넘었다. 내가 나눌 수 있는 육체로 최소한 한 명을 살릴 수 있다면 그 것 하나로도 내 삶은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달 1일 단식을 하여 구조적 착취를 당하는 제3세계와 하루라도 함께하고 그 날의 밥값과 동전을 모아 주로 제3세계 어린이를 후원하고 있다.

채식을 마음에 담아두고서도

혹시 채식 모임에 참여하기가 망설여지지는 않은가요?

난, 아직 채식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는데...

이 정도 하는 것 같고 채식한다고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나요.

하지만 과연 누가 완벽한 채식을 한다고 자랑할 수 있을까요?

알게 모르게 완전채식주의자 역시 육식을 하고 있습니다.

평생 우리가 자면서 우연히 먹는 거미가 8마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채식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채식주의자입니다.

그리고 채식을 시작하는 마음이 모두 같은 수는 없습니다.

생명을 존중해서건, 환경을 사랑해서건, 건강을 생각해서건, 영성을 위해서건

우리가 채식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세상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그 크기에 관계없이 그 자체만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 아닐까요.

육식에 대한 식욕의 희생 이상의 것을 우리는 채식을 통해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상과 나눌 수 있습니다.

채식의 기본은 사랑입니다.

자신은 물론 세상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녹색연합 '베지투스'
http://www.greenkorea.org/zb/view.php?id=month_plan&no=249

싸이월드 클럽 '베지투스'
club.cyworld.com/govegetus

진실로 인간은 동물의 왕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잔인성이 동물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생명체의 죽음을 통하여 살아가는 살아 있는 묘지다.
나는 어렸을 때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며
동물을 살해하는 것을 살인처럼 생각하는 때가 올 것이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 글은 환경 운동가들을 위해 준비한 글입니다.
그래서 채식을 해야 하는 여러 이유 중 환경에 관한 부분에 한정해 글을 전개하겠습니다.

먼저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환경 운동가란 지구의 건강한 환경을 위하여 남다른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스스로 실천하며 운동하는 분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는다거나, 에너지를 절약하고, 친환경제품을 애용하며,
재활용을 하는 등 자신의 생활에서부터 환경 운동을 시작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데 필수적인 생활인 의식주 중 식생활은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환경 운동도 식생활을 바탕으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환경 운동에서 가장 중요하고 활발해야 할 식생활에 관련된 활동은 환경 운동가에서조차 미비합니다.
혹시 환경 운동하는 분들이 다른 활동에 너무 바빠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미국이라는 나라의 축산이라는 한 분야를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미국은 농토의 85%는 동물 사료를 만들기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미국서 생산되고 있는 사료가 우리나라에서도 사용하고 있음을 모두 알고 있을 것입니다.
가축은 섭취하는 곡물 중 10~20%만 살찌우는 데 사용하며 나머지는 생활에너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1kg의 쇠고기를 얻기 위해서는 16kg의 곡물이 소요되고, 곡물 생산에 필요한 농기계 가동과 농약 살포,
도살에서 운반, 포장까지 총 소요되는 에너지량은 곡물의 39배입니다.
1350kg의 콩과 옥수수로는 22명을 먹여 살릴 수 있지만 소를 먹이면 1명만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비율적인 식물성 식품도 가장 효율적인 동물성 식품보다 10배는 더 효율적이라고 합니다.
결국 우리는 육식을 함으로써 최소한 10배 이상의 에너지 낭비와 환경 오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미국 물 사용 절반 이상이 가축 사용에 이용되는데,
평균적으로 소 한 마리를 키우는 데 구축함을 물에 띄우게 하는 양의 물을 소비한다고 합니다.
밀 1파운드 생산에 25갤런(쇠고기 1파운드에 2500갤런)에 비하면 엄청난 물을 소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세계 13억 마리의 소가 방출하는 메탄가스는 약 18% 정도 지구 온난화에 기여(?)한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목축을 위한 산림 파괴로 인한 이산화탄소의 증가, 야생동물의 절멸 등 그 폐해는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현재 원유 매장량을 기준으로 비교하면 인류 전체가 육류 중심의 식생활일 경우 원유를 13년,
더 이상 육류를 먹지 않을 경우 260년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상의 예만으로도 단지 일회용품을 쓰지 않고, 전구를 하나 더 끄고, 변기에 벽돌 하나 더 넣는 등
일반적 환경 보호 활동보다도 채식이 훨씬 환경을 보호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대충 계산으로 고기를 먹을 때마다 먹는 양의 20배 정도 채식보다 환경을 더 파괴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환경 운동가에게 인간 생존의 가장 기본적 활동인 채식은 선택 항목이 아니라 필수 항목인 것입니다.
생명 존중, 건강(환경 호르몬 포함), 명상 등의 효과를 차치하고서 말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다른 환경 보호 활동을 하더라도 채식을 하지 않느니
다른 환경 보호 활동을 하지 않더라도 채식을 하고 채식 운동을 하는 것이 환경을 더 보호하는 것이 아닐까요?
육식이 환경을 망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라는 것을 알고
우리가 생활에서 얼마든지 실천 가능한 것이면서도 채식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길들여진 입맛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 이외에 어떤 핑계를 댈 수 있을까요?
위정자가 자신도 알고 있는 부당한 기득권을 유지한 채 개혁을 높이 소리쳐 부르는 행위를 어떻게 보나요?
단지 채식이 기호의 문제라면 기호 때문에 컵라면을 먹고 기호 때문에 물을 마구 쓰는 것에 대해 뭐라고 설득할 수 있을까요.
개고기 등 육식이 전통적 식생활이라면 아무리 올바르지 않은 것이라도 전통이라면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것일까요?
채식이 환경을 살리는 행동 중 우리 생활과 가장 밀접하고 근본적인 것을 알면서도
인간의 기본 욕구 중 하나인 식생활에서 길들여진 즐거움은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채식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환경 운동가라고 내세울 수 없을 뿐 아니라 부끄럽게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저는 환경 운동가가 하루아침에 모두 완전 채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먹을 것이 육식뿐이라 선택할 여지가 없는데 굶어죽더라도 무조건 채식을 고집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 선택할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음식이 있으며 무엇이 올바른 선택인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채식에 대한 기준과 개인의 신체적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하며,
여지껏 길들여진 입맛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쉽지 않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하루아침에 채식으로 바꿀만한 의지력이 없다면 조금씩이라도 개선하려고 노력해 나갔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환경 행사나 모임 뒷풀이에 육식 위주의 식단이 나오는 것을 보고 실망스러움을 느꼈습니다.
물론 채식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따로 자리를 마련하는 등 다른 단체보다는 배려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한때 담배가 건강에 좋다고 권유될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흡연자가 주변의 눈치를 봐야하듯이
이제는 음식도 적어도 환경 운동에 관련된 단체에서는 육식보다 환경적인 채식을 위주로 하며,
도저히 육식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따로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상 논지가 미비한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리며 토론은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당신이 아기 요람 속에 사과와 토끼를 집어넣었을 때,
아기가 토끼를 먹고 사과를 가지고 논다면,
내가 당신에게 벤츠를 한 대 사 주겠소.
- 하비 다이아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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